제98화

“정씨 가문에서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세상 누구보다 오빠가 잘 알잖아. 수아는 예전부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진짜처럼 만들었고 부모님은 언제나 수아만 감쌌잖아.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오빠는... 믿어줄 거야?” 정서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유현의 얼굴에 잠시 혼란이 스쳤다. “당연하지.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나는 믿을 거야. 서연아, 네가 어떤 상처를 받았든... 나한텐 다 말해도 돼.” 그 말에 정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래도록 꾹 눌러왔던 진실을 꺼냈다. “좋아, 그럼 말할게. 수아가 먼저 최재현을 떠나고 난 후 난 오해와 복잡한 상황에 떠밀려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됐어. 사랑받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조용히 살기로 했을 때 수아가 돌아왔어.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나한테 이혼하라고 강요했어...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오빠는 정말 믿어줄 수 있겠어?” 그녀의 눈빛은 또렷했지만 말끝에는 깊은 피로와 체념이 묻어 있었다. 세상에서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면 그건 열다섯 살 시절의 이유현이었다. 그 시절의 그가 눈앞의 이유현과 겹쳐 보이자, 정서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순간만큼은 지옥 같은 현실을 잠시 잊었다. 너무 오랫동안 참아온 말이었다. 가슴속 깊이 눌러두었던 울분과 아픔이 오늘따라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치밀어 올랐다. 이유현은 그런 정서연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건 미안함과 안쓰러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수아가 네 결혼 생활을 무너뜨린 거란 말이지?” “응. 나 지금 최재현이랑 협의이혼 신청했어. 하지만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봐... 아직은 비밀로 하고 있어.” 정서연은 숨김없이 말했다. 그녀는 지금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자신이 무너졌을 때마다 손 내밀어 주던 그 시절의 ‘오빠’가 여전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유현을 바라보았다. 위로나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