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룸 안에서는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지만 백진우의 귀에는 백연이 키워주겠다는 말만 유독 날카롭게 울렸다.
백연은 웃는 둥 마는 둥 한 얼굴로 그의 반응을 살피며 느긋하게 말했다.
“몸은 깨끗하지? 난 깨끗한 게 좋거든. 뭐 서툴러도 괜찮아. 어차피 내가 천천히 가르치면 되니까.”
어두운 조명 속에서 소년의 귓불이 서서히 붉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성격이 아무리 꼬여있어도 남자는 남자였다.
백진우의 숨결이 조금 헐거워졌다. 그동안 백연을 그저 악랄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런 방탕한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거절했다.
“싫어요.”
거절을 듣자 백연은 입꼬리를 살짝 내려 웃었다.
“그래, 선택은 존중해야지. 억지로 하는 건 재미없으니까. 대신...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와.”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희뿌연 연기가 백진우의 얼굴 위로 퍼졌다.
여성용 담배 특유의 순한 향이 은근하게 감돌아 매캐하기보다는 오히려 맡기 좋았다.
백진우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그녀의 노골적인 도발을 애써 무시했다.
신은아가 백연의 비어버린 잔을 채워주면서 백진우에게 말했다.
“참, 눈치도 없네. 굴러온 복을 제 발로 뻥 차버리는 건 뭐야. 우리 자기가 너 같은 애 키워주겠다는데 냉큼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아들여야지.”
백연은 잔을 받아 조용히 술만 들이켰다.
호스트들과 게임을 몇 판 한 뒤 테이블의 술이 반 이상 비었을 즈음 신은아가 갑자기 화제를 백진우 쪽으로 돌렸다.
“연아, 네 그 남동생 벌써 열여덟이지 않아? 계속 데리고 살 거야? 아니, 내 말은 어차피 친동생도 아니잖아. 열여덟까지 키워줬으면 할 만큼 다 한 거지.”
신은아는 백연의 갑자기 굴러들어 온 남동생을 원래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백연은 술잔을 입에 대며 잔잔한 미소만 지었다.
“걔를 쫓아내면 난 누굴 가지고 놀아?”
다른 친구들은 그녀가 백진우를 학대한다는 사실을 모르니 ‘가지고 논다'라는 말이 딴 의미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오직 백진우만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은근히 쑤셔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신은아는 눈을 크게 뜨며 충격이라는 듯 말했다.
“헐, 자기야. 우리 자기 너무 화끈한데? 걔 성인 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언제부터 놀아먹은 거야?”
백연은 신은아가 이런 의미로 오해할 줄은 몰랐던지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럼에도 태연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취한 척 말했다.
“아직 손 안 댔어. 내가 직접 키운 건데 바로 버리면 아깝잖아. 키도 크고 몸도 깨끗해 보이니까... 질릴 때까지 놀다가 버려야지.”
신은아는 엄지를 척 세우며 감탄했다.
“백연, 넌 진짜... 대단해! 존경스럽다.”
신은아의 말에 백연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근데 좀 말라서 문제야. 조금 더 키워서 살찌우면 그때부터 가지고 놀아야겠어.”
한편 바로 옆에서 자기 몸을 어떻게 ‘가지고 놀지'를 두고 떠드는 걸 듣던 백진우의 눈에는 거의 실체를 띤 증오가 떠올랐다.
정말로 백연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 가느다란 목을 비틀어 조용하게 만들고 머리를 떼어 다시는 말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서빙, 술 왜 안 채워줘?”
백연은 텅 빈 잔을 백진우의 앞으로 내밀었다.
백진우는 묵묵히 몸을 숙여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다가 갑자기 그녀의 하이힐 뾰족한 끝이 그의 팔을 스쳤다.
와인빛 하이힐의 박힌 큐빅들이 반짝이며 얇게 파고드는 듯한 감촉이 그의 피부에 닿아 서늘한 전율을 일으켰다.
“키워주는 건 싫다고 했지. 그럼... 오늘 하룻밤 놀아주는 건 어때? 돈은 얼마든지 줄게.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나?”
술기운이 조금 올라온 백연의 눈빛은 그윽했고 나른한 목소리까지 들리니 누구라도 홀랑 넘어갈 만했다.
룸 안의 모든 호스트들이 전부 질투 어린 눈빛으로 백진우를 바라보았다.
‘하, 운 좋은 놈. 저런 예쁘신 누님한테 찍히다니. 나였으면 얼마나 좋아.'
원래 역겨움을 느끼던 백진우는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고 얇은 입술을 아주 미세하게 올려 대답했다.
“...좋아요.”
지금 백연은 취한 상태였고 오늘 밤 우연한 사고를 만들어 그녀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었다.
클럽을 나왔을 때 백연의 몸은 거의 백진우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는 187 정도의 키였지만 몸에 살이 거의 없어 뼈가 그대로 느껴졌다.
백연은 멋대로 그의 얼굴을 더듬다가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짓이기듯 눌러댔다.
“아, 진짜 잘생겼다. 잘생긴 동생, 한 번 갖고 놀기에는 부족하네. 몇 번 더 놀까?”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사람을 희롱하는 꼴이 딱 술 취한 늙은 바람둥이 같았다.
백진우의 눈에는 짜증이 번졌지만 지금은 밀쳐낼 때가 아니었다.
마침 택시가 도착했던지라 백진우는 그녀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백연이 대충 목적지를 집이라도 읊자 백진우는 짧게 미간을 좁혔다. 정말 집까지 데려가서 놀 작정인 듯했다.
차에 타자마자 백연은 다시 백진우의 어깨에 기댔다.
오늘 그녀는 검은 슬립 드레스를 입어 하얀 피부와 가느다란 허리가 더 도드라져 보였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의 코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백진우의 호흡이 다시 거칠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개만 조금 숙이면 보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잘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방금 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쓰며 대신 옆에 있는 이 여자를 어떻게 죽일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욕조에 물 채우고 드라이기를 던져 넣을까?'
‘아니면 그냥 계단에서 밀어 우연한 사고처럼 만들까?'
‘그것도 아니면... 술을 더 먹이고 바로 눕혀 토사물이 막혀 질식한 것처럼 만들까?'
그렇게 온갖 수를 떠올리던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연은 비틀거리며 대문으로 가 지문을 찍었다. 백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너무도 익숙한 이 집 안으로 말이다.
불 꺼진 집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불을 켜자마자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억지로 아래로 당겼다.
순간 입술이 강하게 맞닿았고 백연의 혀가 그의 입술을 억지로 벌리며 파고들려고 했다.
입안에는 은근한 술 냄새와 설명하기 어려운 달콤한 향이 함께 퍼졌다.
백진우의 눈동자가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 이건 그가 예상했던 장면이 아니었다.
그때 그의 허리춤에서 벨트가 풀리며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안쪽으로 파고들어 정신이 번쩍 든 그는 황급히 백연을 밀어냈다.
하지만 힘이 약해 처음에는 제대로 밀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불만스러웠던 백연이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고 입안 가득 피 맛이 번졌다.
백연은 그를 놓고 손끝으로 자신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조금 전까지 흐릿하던 눈빛은 이미 또렷하게 돌아와 있었다.
“싫어?”
그녀는 차갑게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조금 전 야릇했던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눈빛이었다.
백진우의 눈에는 혐오에 더해 수치가 얼핏 스쳤다. 방금 그는... 그녀의 손길에 정말로 반응해 버렸다.
백연은 가방에서 돈뭉치를 두툼하게 꺼내 그의 가슴팍에 던졌다.
“싫으면 꺼져.”
“이게 무슨...”
백연은 차갑게 비웃었다.
“말했잖아. 난 억지로 하는 거에 흥미가 없다고. 이런 건 나 혼자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잖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 잘라 말했다.
“돈 챙겼으면 빨리 꺼져.”
백진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고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허리를 굽혀 돈을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돈이 절실하지 않았다면 클럽에서 아르바이트 같은 건 절대 안 했을 것이다. 클럽에는 돈 많은 손님이 많았고 그의 빼어난 외모 덕에 서빙만 해도 팁을 쏠쏠하게 받을 수 있었다.
백진우가 돈을 챙겨 나가자 백연은 소파에 풀썩 몸을 던졌다.
손을 들어 올리자 조명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 묘하게 아쉬운 기운이 남았다.
“역시... 소설 속 악역답네. 진짜 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