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이소희는 오빠의 친구를 좋아하게 됐다.
그 남자는 이소희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고, 그래서 이소희는 늘 들키지 않게 짝사랑만 해왔다.
그러다 어느 날, 어둑한 조명 아래서 이소희는 술에 취해 잠든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바로 도망치려 했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느긋하게 이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한테 키스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아쉽지만 오빠는 너처럼 어린애한테는 관심이 없거든.”
이소희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제가 너무 어려서 그래요? 괜찮아요. 저도 빨리 클 거예요.”
유지훈은 멈칫하더니 이내 웃었다.
“그래? 그럼 좋지. 네가 스물두 살 됐을 때도 나를 좋아하면 그땐 한번 생각해 볼게.”
그 순간, 이소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매일 유지훈의 곁을 맴돌았고 그렇게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했던 스물두 살이 되는 날, 이소희는 들뜬 마음으로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룸 문 앞에 도착한 순간, 안에서 낯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이소희는 몇 초간 멍하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안에서 유지훈이 아기를 안은 채 달래고 있었다. 아기는 목이 터져라 울었고 주변에 둘러앉은 남자들은 모두 귀를 막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지훈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그 여자애를 거절하려고 갓난아기까지 데려와서 네 자식이라고 속일 생각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소희의 머릿속이 ‘윙’ 하고 울리며 생각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그럼 어쩌겠어.”
유지훈은 평소처럼 늘어지고 태연한 톤으로 말했다.
“오늘이 걔 스물두 번째 생일이잖아. 예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러 올 거야.”
“이소희가 그렇게 싫어? 솔직히 걔 꽤 괜찮잖아. 예쁜 데다가 착하고 너한테 완전 진심인데.”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야.”
유지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내 마음속에 누가 있는지 너희도 알잖아.”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방 안 사람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인이구나. 어쩐지. 야, 솔직히 네 얼굴이면 누가 안 넘어가겠냐? 최가인이 싫어할 리가 없는데 네가 괜히 혼자 너무 신중하게 굴었어.”
“몇 년이나 말을 못 꺼낸 것도 괜히 말했다가 친구 사이마저 깨질까 봐 그랬어. 그런데 마침 소희 일도 그렇고... 타이밍이 딱 맞네.”
유지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인이한테는 이렇게 말했어. 어떤 어린애가 나한테 계속 들러붙어서 곤란한데 잠깐만 내 가짜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고. 그때 이 아기도 같이 데려가서 우리 둘이 결혼한다고 연기하면 그 애도 완전히 마음을 접을 거라고. 그럼 우리 사이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겠지. 가짜 결혼식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가인이한테 제대로 고백할 생각이야.”
한 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유지훈의 계획에 방 안에서 감탄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웃고 떠드느라 문밖에 이소희가 서 있는 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소희의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그녀는 도저히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 눈물이 얼굴을 가득 적신 채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클럽 밖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는데 정신없이 달리는 이소희는 며칠을 고민해 고른 원피스가 흠뻑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유지훈이 단 한 번도 자신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는 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소희는 열네 살에 처음 그를 봤을 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날 하교 시간에 오빠가 마중을 오지 않았고 그녀는 골목에서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였었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유지훈이 그들을 쫓아내고 그녀를 구해줬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던 이소희에게 유지훈은 자기 옷을 덮어주고 초콜릿 두 개를 건네며 웃었다.
“울보야, 콧물까지 흘렸네. 네 오빠는 농구하느라 바쁘대. 가자, 오빠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날 이소희는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초콜릿을 먹었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
오빠 이민준 덕분에 그녀는 거의 매일 유지훈을 볼 수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덩굴처럼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났다.
도시락을 싸는 법을 배운 이소희는 일부러 여러 개를 싸서 이민준에게 들려 보냈고 유지훈이 하나라도 먹어주길 바랐다.
그녀는 유지훈의 취향을 알아내기 위해 애썼고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핑계를 만들어 선물을 줬다.
게다가 그를 위해 유학도 포기하고 서울에 남아 스물두 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이소희는 8년을 버텼고 그 끝에 마침내 유지훈과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유지훈에게 있어 그저 짐이었고 귀찮은 집착이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흐른 뒤 이소희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이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그녀가 목이 잠긴 채로 말했다.
“나 생각해 봤는데 유학 갈게. 그리고 오빠가 말했던 그 친구분도 한번 만나볼게.”
이소희가 유지훈을 좋아한다는 건 그들의 지인들에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빠 이민준은 그녀를 볼 때마다 뭐라고 말하고 싶어 하다가도 늘 말을 삼켰고 대신 이런저런 남자를 소개했었다.
그가 이번에 이소희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한 외국에 있는 친구는 벌써 열여덟 번째 상대였다. 그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한다. 게다가 이민준은 디자인 공부하는 이소희에게 외국에서의 경험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민준은 유지훈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그녀를 말리려 했던 걸까.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다 들었어?”
이소희는 눈을 감았고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훈 오빠가 정말 최가인 언니를 그렇게 좋아해?”
“응...”
“그럼 축복해 줘야지.”
그녀는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바라는 대로 이제 정말 오빠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집에 돌아온 이소희는 기계처럼 캐리어를 열고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는데 확인해 보니 유지훈이었다.
[왜 안 와?]
이소희는 한참 동안 그 메시지를 쳐다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또 하나 도착했다.
[소희야, 나 여자 친구 있어. 애도 낳았고 곧 결혼해. 이제 나 좋아하지 마.]
그리고 두 장의 사진이 이어서 전송됐는데 하나는 아기의 발바닥을 찍은 사진, 다른 하나는 정성스럽게 꾸며진 청첩장 사진이었다.
이소희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지고 서랍 깊숙이 숨겨두었던 철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영화 티켓, 놀이공원 입장권, 몰래 모아둔 유지훈의 농구복, 그가 선물했던 인형까지, 8년 동안 유지훈과 관련된 모든 추억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이소희는 상자를 안고 밖으로 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