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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오후, 송찬미는 절친 신지영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 신지영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찬미야! 나 1월 4일 밤 9시에 강릉 청양 공항에 도착하는데, 마중 나올 수 있어? 오랜만인데 보고 싶어 죽겠어!” 송찬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아마 못 갈 것 같아. 병원에서 엄마 간호해야 하거든.” 그 말에 신지영의 들뜬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주머니 편찮으셔? 심각해?” 송찬미는 숨기지 않고 메마르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위암이래. 벌써 중기야.” 신지영의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말했다. “찬미야, 미안해. 아주머니가 그렇게 아프신데 그것도 모르고 마중 나오라고 했네.” 송찬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사과를 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신지영이 말했다. “내가 위암 치료 최고 권위자 알아봐 줄게. 중기면 아직 치료할 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엄마의 병 이야기를 하자 송찬미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응, 고마워, 지영아.” “지금 바로 의사 선생님 알아볼게. 찬미야, 너 아주머니 돌보면서 네 몸도 잘 챙겨. 그러다 쓰러지면 안 돼, 알았지?” “어.” 송찬미는 작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송찬미는 혼자 학교 숲으로 갔다. 이 시간 숲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홀로 돌의자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마침내 참지 못하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 신지영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신승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내 고등학교 베프 송찬미 기억나요? 예전에 내가 집에 데려왔던 그 친구.” 신승우는 송찬미의 이름을 듣자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대답 대신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 신지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걔네 엄마가 아프대요. 위암 중기라는데. 오빠 인맥 총동원해서 위암 치료 경험 제일 많고 권위 있는 의사 좀 알아봐 줘요. 엄청 급해요!” 신승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 ‘송찬미의 어머니가 위암이라고?’ 비서에게서 오늘 아침 송찬미와 어머니가 강릉대병원에 갔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그냥 가벼운 병이나 건강검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위암이라니. 신승우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오빠 듣고 있어요?” 신지영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이건 제 부탁이에요. 찬미는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란 말이에요. 오빠가 어떻게든 도와줘야 해요.” 신승우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알았어.” ... 송찬미가 알바하는 식당은 오후 다섯 시에 출근이었다. 엄마와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 송찬미는 사장에게 전화해 두 시간 휴가를 내려 했다. 그러자 사장은 욕설을 퍼부었다. “오늘 가게에 단체 예약이 몰렸어! 저녁 7시에만 다섯 테이블이 잡혔는데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란 데 네가 지금 빠지겠다고? 꼭 바쁠 때만 골라 지랄이야. 5시까지 당장 튀어와! 안 오면 해고될 줄 알아!” 사장은 제 할 말만 쏟아내고 전화를 끊었다. 송찬미는 한숨을 쉬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 네 시였다. 잘리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가게로 출발해야 했다. 지금은 돈이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라, 그곳 월급이 짜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송찬미는 병실로 돌아가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버스를 타러 갔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송찬미는 멀미를 참으며 대학생 알바 단톡방의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대부분 과외나 주변 식당, 카페 아르바이트였는데, 월급은 그녀가 지금 하는 세 가지 알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과외 시급이 그나마 조금 높은 편이었고 나머지는 순전히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 시간당 수입이 형편없었다. 그 돈으로는 그녀의 급한 불을 끄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가 막막해하고 있을 때, 신지영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송찬미가 전화를 받자 신지영이 말했다. “찬미야, 지금 국내 최고의 병원은 부산에 있는 화광병원이야. 내가 위암 치료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사 선생님께 연락해놨어. 전문가 진료 예약도 잡아줄 수 있어. 아주머니 병은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니까, 되도록 빨리 병원을 옮기는 게 좋을 거야.” “고마워, 지영아. 내일 엄마랑 상의해볼게.” “응, 최대한 빨리 결정해. 부산에 가면 꽤 오래 머물러야 할 테니까, 우리 집 비어있는 곳 있으니 너랑 아주머니 쓰면 돼. 일단 학교 일부터 잘 정리해봐.” “알았어. 정말 고마워.” ... 식당 일이 끝난 시간은 이미 새벽 네 시였다. 학교는 밤 열한 시 이후에는 기숙사 출입이 금지되었다. 다행히 학교 북문 근처 작은 숲 뒤편에 비밀통로가 있었다. 낡아빠진 철창이었는데 누군가 손을 써서 철창 두 개를 양옆으로 확 휘어놨다.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면 쏙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밀통로에는 ‘개구멍'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이름도 붙어 있었다. 예전에 송찬미는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면 이 ‘개구멍'을 통해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송찬미가 사는 곳은 4인실 기숙사로 침대가 위에 있고 책상이 아래에 있는 구조였다. 룸메이트 임서월은 요즘 남자친구와 호텔에서 지냈고 다른 룸메이트 한 명은 집이 강릉 시내라 오늘 돌아갔다. 이제 기숙사에는 송찬미를 제외하면 룸메이트 오예리 한 명뿐이었다. 오예리는 잠귀가 엄청나게 어두워서 한번 잠들면 천둥이 쳐도 깨지 못하는 애였다. 송찬미는 문을 열고 들어가 휴대폰 손전등을 켠 채, 살금살금 옷과 신발을 갈아입었다. 이 시간엔 이미 온수가 끊겨서 샤워는 낮에나 할 수 있었다. 씻고 침대에 눕자 송찬미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심영준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카톡을 열자 그에게서 온 안 읽은 문자가 십여 개나 쌓여 있었다. 송찬미는 대충 훑어보았다. 내용은 늘 똑같았다. 가난한 척, 잘못했다는 말, 용서를 구하는 말들뿐이었다. 송찬미는 대화창에 입력했다. [우리 헤어지자.] 하지만 막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무언가 떠오른 그녀는 생각을 바꿨다. 그날 밤 룸에서, 심영준은 아직 실컷 놀지 못했다고 지껄였었다. 지금 당장 헤어지자고 하면 그놈은 분명 귀찮게 들러붙을 게 뻔했다. 그녀는 지금 그와 실랑이할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며칠 뒤면 시험 기간이고 기말고사가 끝나면 엄마를 모시고 부산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만에 하나 심영준이 포기하지 않고 부산까지 쫓아오면 어떡하지?’ 송찬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일단 헤어지자는 말은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심영준의 거지 놀음에 장단이나 맞춰주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강릉을 떠서 완벽하게 잠수 타버리는 거다. 면전에 대고 헤어지자고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확실했다. 빌고 자시고 할 틈도 주지 않는 거니까. 그때 가서 연락처 싹 차단하고 번호도 바꾸면 심영준은 매달리고 싶어도 그녀를 찾을 수조차 없을 테니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복수가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찬미는 심영준에게 답장을 보냈다. [알바 중이라 폰 못 봤어. 씹은 거 아냐. 이제 퇴근해서 기숙사 왔는데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잘게.] 시간은 벌써 새벽 네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심영준에게서는 답장이 없었다.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송찬미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둔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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