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박태진은 허소원의 맞은편에 앉아 표정 한번 변하지 않았다.
오직 박태진만이 그가 이 갈팡질팡하는 명의에게 처음부터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방금 그녀가 한 말들은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를 붙잡아둔 건 마지막 발악이었을 뿐이다.
죽은 말도 살려보자는 식이었다.
허소원은 박태진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병력 기록에 적힌 다른 의사들의 치료 내용을 확인했지만 특별한 문제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어 검사 결과와 촬영한 영상들을 차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역시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했지만 10여 분 뒤 한 장의 영상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시신경 근처의 뇌 부위 CT 사진에 짧은 흰 실 같은 흔적이 보였다.
허소원은 잠시 살펴보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다른 사진들과 비교해 보니 놀랍게도 다른 사진에는 이 흔적이 없었다.
‘이상하네.’
그녀는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집중해서 관찰했다.
정시훈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심각해진 모습을 보이자 물었다.
“맨디 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발견하셨나요?”
허소원은 그 CT 사진을 건네며 흔적이 있는 부분을 가리켰다.
“이 부분에 대해 검사할 때 의사가 뭐라고 설명하지 않았나요?”
바로 이 위치에 나타난 이 흔적은 어떻게 봐도 수상쩍었다.
정시훈은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당시 의사들도 이 흔적을 발견하고 바로 재검사를 했는데 두 번째 결과에는 이것이 사라졌었어요. 그래서 첫 검사 때 기계에 문제가 있었다고 결론 내렸죠. 처음에는 저희도 불안해서 여러 번 더 검사를 했지만 계속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허소원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의아해했다.
일반적으로 검사에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이런 예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녀의 경험상 이 흔적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추측이 섰다.
그녀는 박태진을 향해 물었다.
“전에 암살 시도를 당해 독에 중독됐다고 했는데, 그 독이 뭔지 아세요? 이 자료에는 기록이 없네요.”
정시훈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성분이 매우 복잡한 독이었는데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안 나네요. 선생님, 저희 대표님 시력이 그 독과 관련이 있나요? 그 독은 이미 해독이 다 됐는데 문제가 있을 리가...”
그 독은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맹독이었다.
하지만 허소원의 대답은 달랐다.
“해독됐다고 해서 무관하다는 건 아닙니다. 약리 작용은 복잡해요. 그 독이 직접적으로 실명을 유발하지 않았다 해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어요. 어쨌든 저는 이걸 확인해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정시훈은 이 말에 활기를 띠며 물었다.
“맨디 선생님, 그 말은 즉시 확인만 되면 저희 대표님을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완치도 가능하다고요?”
허소원은 자료를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현재 상태로는 어느 정도 진단이 가능하지만 더 자세한 검사와 함께 그가 중독된 독이 제 예상과 일치하는지 확인이 필요해요. 만약 그렇다면 치료는 확실히 가능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정시훈은 오랜만에 의사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다행입니다! 맨디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바로 그 독에 관한 자료를 찾아올게요!”
말을 마치자 허소원이 반응하기도 전에 재빨리 문을 나갔다.
정시훈이 떠나자 진료실에는 허소원과 박태진만 남았다.
진료실은 공기가 꽉 막힌 듯 조용했다.
둘 다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박태진은 성격상 말이 없었고 허소원은 말을 꺼내면 신분이 탄로 날까 봐 조심했다.
게다가 긴 시간 일하니 목이 말랐다.
그녀는 일어나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물을 마시던 중 박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저도 한 잔 주실 수 있나요?”
허소원은 입을 삐죽거렸다.
‘제법 잘도 부려 먹는구나.’
허소원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2000억 원의 진료비를 생각하며 그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
“여기요.”
그녀는 다가가 컵을 건넸다.
박태진은 청각에 의존해 손을 뻗었지만 둘 사이의 거리를 잘못 짚어 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허소원의 손목을 건드렸다.
“아!”
허소원은 손이 저려 컵을 놓쳤고 컵은 그의 다리 위로 떨어졌다.
물은 전부 그의 바지에 쏟아졌으며 바지는 순식간에 젖어버렸다.
“어머!”
허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휴지를 집어 그의 다리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손을 왜 그렇게 높이 드는 거예요? 괜찮아요? 데지 않았어요?”
박태진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몰라 눈썹을 찌푸렸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바지가 축축해져 불편했다. 결정적으로 허소원이 그의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평소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박태진은 근육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는 평생 허소원 말고는 다른 여자에게 이렇게 몸을 맡겨본 적이 없었다.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어.’
그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는 굵은 손목으로 허소원의 손을 붙잡아 자기 다리에서 떼어냈다.
허소원은 그의 반응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원래 허리를 굽혀 그의 바지를 닦고 있던 차에 갑자기 잡아당겨지니 그녀는 중심을 잃었다.
곧이어 그녀는 박태진의 위로 넘어졌다.
“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 그녀는 목소리가 갈려졌고 머리는 박태진의 턱에 강하게 부딪혔다.
둘은 소파에 뒤엉켜 넘어졌다.
박태진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허소원은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반쯤 그의 다리 위에 앉은 채 가슴팍에 손을 짚은 상태였다.
박태진은 소파에 완전히 눌려 있었다.
둘의 자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