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심유찬도 마음이 불편한 듯 시선을 피하며 더는 소이정과 마주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문유정이 불에 기름을 붓듯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유찬이가 나 좋아하니까 이걸 준 거야. 그게 그렇게 중요해?”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찬과 임세윤은 본능적으로 문유정을 자신들 뒤로 숨겼다. 혹시 소이정이 순간적으로 화가 나 문유정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소이정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안에는 조용한 결심만 가라앉아 있었다.
“앞으로, 제일 먼저 내 디자인 시안을 너희한테 보내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먼저 임세윤을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심유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앞으로는, 너 잘되라고 빌지도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소이정은 단호하게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 더는 그들과 어떤 관계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그녀는 그 두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의 사과 메시지는 매일 빠짐없이 도착했지만, 소이정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과하는 건 잘못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붙잡지 못하면 문유정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라는 걸.
그런 날들이 개학 전날까지 이어졌고, 소이정은 마지막으로 예전에 함께 다녔던 비밀 아지트로 향했다.
부모가 이혼한 뒤, 그녀가 장미를 좋아한다는 걸 안 두 사람은 그녀 이름으로 작은 땅을 사서 장미를 가득 심어주었다. 힘들 때마다 찾던 곳이었고, 두 사람 역시 늘 이곳에서 그녀를 찾곤 했다. 내일이면 의천시로 떠나야 했다. 오늘이 이곳을 찾는 마지막 날일 것이다.
하지만 도착한 아지트의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장미는 온통 뜯겨 흐트러져 있었고, 꽃잎은 문유정이 사진을 찍으려고 뿌려놓은 채 바닥에서 짓밟혀 있었다. 한때 장미 정원을 직접 가꿔주던 두 사람은, 그 정원을 망가뜨린 문유정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듯, 입구에 선 소이정을 본 두 사람은 표정이 굳어졌고 동시다발적으로 달려왔다.
“이정아, 우리 말 좀 들어. 그냥 유정이가 여기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우리가...”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처연할 만큼 고요한 평온뿐이었다.
“괜찮아. 너희 계속 찍어.”
그녀는 짧게 말하고는 뒤돌아 걸었다.
“이정아!”
“이정아, 잠깐만!”
두 사람이 동시에 부르며 따라왔지만, 소이정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양쪽에서 누군가 손목을 붙잡았을 때에야 걸음을 멈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일 개강하면 내가 데려다줄게. 네가 우리한테 내일 대답해주기로 했잖아.”
심유찬은 손목을 꼭 잡았지만, 마음속엔 설명하기 힘든 불안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임세윤도 마치 경쟁하듯 이어 말했다.
“내 차 타고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나도 네 답 기다리고 있어.”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경쟁 중이었다. 소이정은 힘을 살짝 주어 그 손들을 떼어내고, 담담하게 웃었다.
“걱정 마. 난 벌써 정했어.”
그녀는 돌아섰다. 남겨진 두 사람의 마음속엔,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불안이 깊게 번졌다.
다음 날 아침, 짐을 챙기고 심유찬, 임세윤, 문유정을 모두 차단하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딩동’ 알림음이 동시에 울렸다.
심유찬: [이정아, 미안. 나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너 데려다 못 갈 것 같아.]
임세윤: [이정아, 나도 오늘 못 가.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
두 메시지를 본 그녀는 자연스럽게 문유정의 SNS을 열었다. 그곳에는 방금 올라온 글 하나가 떠 있었다.
[대학은 진짜 좋다니까. 짐 들어준다며 선배들이 줄을 서네!]
소이정은 짧게 웃었다. 두 사람이 말한 일이란, 결국 문유정이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 봐 두려웠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연락처를 조용히 하나씩 차단했다.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서기 전, 열여덟 해를 살았던 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불을 붙였다.
오래된 집은 순식간에 불길에 삼켜졌다.
소이정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이상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