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진서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하준 씨, 미쳤어요? 저 임산부예요. 게다가 심각한 빈혈까지 있다고요!”
이 말을 들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
“박 대표님, 빈혈 환자는 헌혈하면 안 돼요. 게다가 임산부인데...”
박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억지로 헌혈하면 어떻게 되나요?”
“생명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하준은 망설였다.
하지만 수술대에 누워있던 진하나가 갑자기 깨어났다.
“형부, 어떻게 언니한테 헌혈하라고 할 수 있어요? 언니는 임신 중인데 혹시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진서연은 눈빛이 차갑게 굳은 채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진하나, 넌 아무렇지도 않잖아. 일부러 나 괴롭히려는 거지?”
그녀는 진작에 예상했어야 했다.
진지웅도 RH 음성 혈액형이었으니, 진하나가 정말 생명의 위기에 처했다면 자신이 헌혈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진서연은 몸을 일으켜 나가려 했지만 박하준이 다시 그녀를 잡았다.
“진서연, 하나는 네 친동생이야. 죽어가는 걸 이렇게 외면할 거야?”
말을 마친 그는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
“빨리 피 뽑아요. 환자가 잘못되면 당신 목숨으로 갚아야 할 테니!”
박하준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강성 도련님이었다.
감히 그를 거역할 수 없었던 간호사는 즉시 채혈침을 집어 진서연의 혈관에 찔러 넣었다.
진서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이를 악물었다.
“하준 씨, 진짜 쓰레기네요!”
박하준의 눈빛이 움찔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손의 힘이 풀렸다.
이때, 귓가에서 진하나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형부, 언니 풀어줘요. 차라리 제가 죽을게요...”
그는 문득 진하나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목숨을 잃었으리라는 것을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며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진서연의 귓가에 말했다.
“네 할머니가 잘못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움직이지 마.”
진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저항을 멈췄다.
‘박하준, 맹세코 네가 살아있는 동안 지옥을 맛보게 해줄 거야!’
10분 후, 간호사가 채혈을 마쳤다.
채혈침을 뽑자마자 진서연은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하루 밤낮으로 혼수상태였다.
진서연은 온몸이 쑤시고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간호사는 그녀를 위해 음식을 사 왔다.
“고마워요.”
진서연이 힘없이 말했다.
“천만에요.”
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박 대표님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임신한 부인을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랑...”
진서연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론 박하준이 지금 진하나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그의 눈에는 자신의 목숨마저 아무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음식을 다 먹고 난 진서연은 체력을 조금 회복했다.
퇴원 절차를 밟고 택시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개인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로 보냈다.
그리고 5년간 샀던 커플 물건들, 결혼사진까지 모두 마당으로 가져와 태워버렸다.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박하준이 돌아왔다.
“서연아, 뭐 태우는 거야?”
진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쓰레기요.”
박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버리면 되지, 왜 태워?”
태워야만 완전히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진서연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박하준은 그녀가 듣지 못한 줄 알고 다시 물으려다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 많이 좋아졌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그런데 너는 좀 괜찮아? 왜 그렇게 빨리 퇴원했어?”
인내심이 바닥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박하준이 쫓아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네가 화난 거 알아. 하지만 그때 상황이 급박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한테 헌혈하게 한 거야.”
말을 마치고 난 그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꺼냈다.
“이걸로 사과할게. 마음에 들어?”
어이없었다.
박하준의 수법 또한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서연이 목걸이를 낚아채 땅에 던져버리는 것을 본 박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 목걸이는 내가 경매장에서 400억 주고 사 온 건데 보지도 않고 던져버리는 거야?”
“제 피가 꽤 값지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값져도 하준 씨 마음속에선 진하나의 목숨보다 못하겠죠.”
이 말을 마친 진서연은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하준이 쫓아가려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진하나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부, 언제 병원에 올 거예요? 보고 싶어요.”
“곧 갈게.”
박하준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서연은 박민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저 도착했어요. 짐 다 챙겼어요?”
진서연은 창가로 다가가 보가티 시론 옆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박민재를 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금싸락처럼 그의 몸에 쏟아져 내려, 마치 금테를 두른 듯 보였다.
“네.”
진서연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지금 내려갈게요. 기다려요.”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미련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