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택시는 산 중턱에서 멈춰 섰다.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몇 번이나 힐끔거리더니 말했다.
“아가씨, 앞은 아우라힐 개인 소유지라 택시가 더 못 들어가요. 위치 잘못 찍은 거 아니에요?”
나는 휴대폰을 들어 아버지가 보내준 빨간 점을 다시 확인하고, 이틀이나 갈아입지 않았지만 여전히 편안한, 비행기 타려고 입은 운동복 차림을 한 번 내려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기사님,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려 모자를 푹 눌러썼다.
아버지는 정말 즉흥적이었다.
어젯밤 한밤중에 갑자기 전화해서는, 나에게 혼사를 결정했다고 했다.
상대는 육씨 성을 가진 남자라는데 외모나 능력 모두 최상급이라 했다
성의를 보이겠다며, 굳이 늘 비어있던 내 명의의 이 별장에서 만나야 한다고 했다.
‘땅을 빌려서 생색내려는 거겠지.’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문을 올려다봤다.
원래라면 위엄 있고 장중했어야 할 검은 철제 조각 대문이 지금은 온통 분홍색 풍선으로 감겨 있었다.
대문 위에는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육민재 & 최유리 결혼식]
나는 순간 멍해졌다.
‘결혼? 아버지는 분명 맞선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 육씨 가문 도련님은 아예 결혼식부터 하려는 건가? 설마 나한테 깜짝 이벤트라도 하겠다는 건가? 바로 결혼으로 직행하는 그런?’
그런데 이름이 이상했다.
‘최유리는 누구야?’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고 캐리어를 끌며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경비 몇 명이 경비실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야! 야! 뭐 하는 거야!”
한 경비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내던지며 곤봉을 들고 막아섰다.
“구걸은 딴 데 가서 해. 여기가 어딘지 알아? 오늘은 육 대표님이 전관 대관이야. 잡것은 꺼져.”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육 대표님 찾으러 왔어.”
경비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었다.
“육 대표님을 찾는다고? 네가 육 대표님이랑 무슨 사이인데? 거울 좀 보고 말해.”
그때, 멀리서 몇 사람이 걸어왔다.
선두에 선 남자는 몸에 잘 맞지도 않는 흰색 정장을 입고, 머리는 기름을 잔뜩 바른 듯 번들거렸는데 휴대폰으로 음성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오 대표님, 오늘 장소 폼 좀 나죠? 제 실력도 보여드렸고요. 앞으로 육진 그룹 투자 건은 전부 대표님께 기대야죠! 82년산 와인도 특별히 공수했어요. 지금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문 앞의 소란을 보고 그는 휴대폰을 내리며 짜증스럽게 다가왔다.
“뭐야? 귀한 손님 맞이해야 하는데 소란 피우는 거 안 보여?”
경비는 즉시 태도를 바꿨다.
“육 대표님, 이 여자가 허름한 캐리어 끌고 와서는 대표님을 찾는다고...”
육민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 시선은 마치 시장에서 썩은 채소를 고르듯 한 눈빛이었다.
나는 불쾌함을 억누르고 최대한 예의를 지켰다.
“육 대표님이시죠? 저는 진지혜입니다. 집안에서 오라고 해서 왔어요.”
‘진지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육민재의 얼굴에 잠깐 멍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한 경멸로 바뀌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며 넥타이를 정리했다.
“진지혜?”
그가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싸구려 향수 냄새가 확 끼쳤다.
“아, 생각났다. 너, 그 누구더라?”
그는 과장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한데, 예전에 만난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너 같은 급은 솔직히 기억에 안 남아.”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만 연기해.”
그는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돈 좀 벌고 아우라힐 들어오니까 옛날 일 들먹이며 돈 뜯으러 온 거잖아? 미리 말해두는데, 어림도 없어.”
그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오늘 나는 수백억짜리 비즈니스가 있어서 너 같은 골드 디그랑 놀 시간 없어. 눈치 있으면 꺼져. 안 그러면 서울에서 못 살게 해줄 테니까.”
나는 그의 오만한 얼굴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 아빠 안과부터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게 아빠가 말한 젊고 유능한 인재야?’
“이 별장이 네 거라고?”
화가 나서 웃음이 나온 나는 발밑의 타일을 가리키며 물었다.
“허풍도 정도껏 떨어야 안 들키는 거야.”
“어이구, 제법 까부네?”
그가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뒤에서 애교 섞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누구랑 그렇게 화내? 몸 상해.”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 정도로 긴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정교한 화장을 한 얼굴이었는데 목에 파란 사파이어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걸이는 내 것이었다.
이 별장 전시 진열장에 두었던 내 성인식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