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문서아가 희미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팔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단번에 정신이 들었다.
문서아가 왼팔을 조금 움직이자 두꺼운 붕대가 살을 잡아당겼고 아주 조금만 건드려도 살점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확 번졌다.
박태윤은 정말로 문서아의 몸에서 피부를 떼어 내, 조가희의 화상 부위를 메우게 했다.
병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최현우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사모님, 깨어나셨군요. 박 대표님께서 긴급한 해외 프로젝트를 직접 처리하셔야 해서 이미 출국하셨습니다. 이건 대표님이 전달하라고 하신 선물입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당분간은 몸 잘 추스르시고, 앞으로는... 성격을 좀 죽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성격을 죽이라니...’
‘나의 피부를 떼어 조가희에게 가져다 바치고도, 돌아서서는 이런 차가운 말로 나를 달래려는 건가. 게다가 나보고 고분고분해지라고?’
문서아는 이를 악물고 다치지 않은 오른팔로 선물 상자를 모조리 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가.”
쉰 목소리였지만 얼음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 사람 물건이랑 같이 들고 당장 꺼져.”
최현우는 바닥에 흩어진 보석들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허리를 숙이고 병실을 나갔다.
그 뒤 며칠, 문서아는 병원에서 혼자 버텼다.
혼자 붕대를 갈고, 혼자 밥을 먹었다.
등과 팔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고, 약을 바꿀 때마다 다시 한 번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문서아는 이를 악물고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퇴원하던 날, 하늘은 잔뜩 흐렸다.
문서아가 수속을 마치고 병원 현관으로 나서는 순간, 마침 같은 날 퇴원하는 조가희와 마주쳤다.
흰 원피스를 입은 조가희가 문서아를 보자 부드러운 척하면서도 은근히 비웃는 미소를 지었다.
“서아 언니, 이렇게 또 마주치네요. 오늘 퇴원이세요?”
조가희는 친한 척 문서아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문서아는 냉담하게 몸을 비켜 피했다.
조가희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 제 생일이에요. 아주버님이 저 때문에 성대한 생일 연회를 열어 주셨거든요. 서아 언니도 같이 오세요. 사람이 많으면 더 재밌잖아요.”
문서아는 눈꺼풀조차 들기 귀찮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관심 없어.”
그런데 조가희가 문서아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쥐면서도 얼굴에는 여전히 순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 오고 싶으신 건... 아주버님의 눈에 저만 가득한 걸 보면, 서아 언니가 견디기 힘들까 봐서요?”
문서아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문서아는 조가희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돌아서서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조가희를 내려다봤다.
“넌 박태윤이 널 좋아하는 거...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조가희는 문서아의 얼굴빛이 변하는 걸 보자, 기다렸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제 숨기지도 않는 우쭐함이 배어 있었다.
“처음에는 저도 몰랐어요. 아주버님이 잘해 주시는 건 그냥... 제가 불쌍해서 챙겨 주는 줄 알았죠.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술을 마시고, 아주버님이 방까지 데려다주셨는데... 몰래 저한테 키스하셨어요.”
조가희는 일부러 말을 끊고, 문서아의 눈이 확 조여드는 모습을 천천히 즐겼다.
“그때 확신했어요. 아주버님의 마음속에 제가 있다는 거...”
‘몰래 키스했다고...’
문서아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온몸이 굳었다.
박태윤은 문서아와 잠자리조차 날짜를 정해 두고 움직였다.
정밀한 기계처럼 늘 엄격하고 차갑던 남자였다.
‘감정이라는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이던 박태윤이 동생의 아내를 몰래 키스했다고?’
문서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조가희는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많이 아프죠. 서아 언니?”
조가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칼처럼 꽂혔다.
“서아 언니는 집안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서아 언니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남성시에서 파리까지 줄 세워도 모자라잖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서아 언니가 제일 사랑하는 남자 마음속에는... 저, 조가희가 들어 있는데.”
조가희는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처음으로 문서아 앞에서 열등감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인 우월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드디어 어떤 한 가지에서는 제가 서아 언니를 이겼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행복한 순간을 서아 언니가 직접 와서 봐 줘야 하지 않겠어요?”
문서아는 조가희가 느끼는 얄팍한 승리감 때문에 속이 뒤집혔다. 역겨움과 서늘한 비애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조가희, 박태윤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넌 지금도 박수찬 아내야. 법적으로 말이야...”
문서아는 한 걸음 다가서며 태생부터 몸에 밴 오만한 기운으로 조가희한테 쏘아붙였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박태윤이 정식으로 맞아들인 아내이지.”
문서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나한테 와서 존재감 찾고 싶어? 너는 아직 그럴 자격 없어.”
문서아는 조가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것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단호하게 떠났다.
집에 돌아온 뒤 문서아는 기계처럼 밥을 먹고, 씻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숨 막히는 현실에서 도망치듯 그냥 빨리 잠들고 싶었다.
그런데 한밤중, 도우미가 허겁지겁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큰일 났어요! 밖에 경찰이 잔뜩 와서... 사모님을 찾는대요!”
문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겉옷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제복을 입은 경찰 몇 명이 서 있었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선두에 선 오진호 형사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문서아 씨 맞으십니까? 오늘 밤 박씨 저택에서 열린 생일 연회에서 조가희 씨가 독극물 중독 의심으로 쓰러져 현재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저희가 1차로 확인한 바로는 문서아 씨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어, 남성 경찰서로 동행해 조사에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독극물?’
문서아는 어이가 없어서 숨이 턱 막혔다.
“저 독 안 탔어요. 오늘 그 연회에 가지도 않았고요.”
옆에 있던 도우미도 급히 거들었다.
“맞아요. 형사님, 사모님은 오늘 내내 집에 계셨어요. 밖에 나가신 적도 없는데요. 뭔가 착오 아니에요?”
팽팽한 실랑이가 이어지려던 순간,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밤공기 같은 냉기를 두른 박태윤이 들어왔다.
도우미는 구세주를 본 듯 박태윤에게 달려갔다.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누가 신고했는지, 사모님이 조가희 씨에게 독을 탔다고 경찰이 왔는데... 이게 말이 돼요?”
박태윤은 느릿하지만 단호한 걸음으로 거실 한가운데까지 들어왔다.
박태윤의 시선이 경찰들을 훑고 지나가더니, 끝내 창백해진 문서아의 얼굴에 멈췄다.
박태윤은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신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