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다만 드레스샵에는 서아진 혼자였고 신지환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분명 오후 3시에 함께 웨딩드레스를 골라주겠다고 했는데 3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걸 보고 기대에 부풀었던 서아진의 마음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신지환이 약속을 어긴 건 이번이 10번째다.
이 세상에 꼬박 십 년을 있었는데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한 사람은 화답이 없었고 돌아온 건 실패가 뻔히 보이는 공략과 곧 닥쳐올 화재였다.
‘오히려 잘됐네. 이제 돌아갈 수 있게 된 거잖아.’
드레스샵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신지환은 부랴부랴 달려왔다.
“아진아, 미안해.”
문을 열고 들어온 신지환은 밖에서 달고 온 한기를 가득 머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린이 10년 넘게 기른 강아지가 있는데 사라져서 펑펑 울더라고. 오후 내내 같이 찾아줬어.”
신지환은 서아진 옆으로 다가가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지만 후자가 티 나지 않게 피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음에, 다음에는 꼭 같이 골라줄게.”
서아진이 그런 신지환을 올려다봤다. 신지환이 잘생긴 건 이 소설로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소설에 쓰인 신지환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이랬다. 청아한 달빛과도 같은 아우라, 깊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오므린 얇은 입술, 거리감이 느껴지면서도 매혹적인 얼굴이다.
다만 이런 사람이 원작에서는 여주 주여린을 목숨보다 더 사랑해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서아진은 소설을 보면서 그런 신지환이 너무 마음 아프고 가련해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시스템과 연동해 일편단심인 남자 조연을 구원하는 임무를 받았고 그가 프러포즈했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하고 세상이 그를 밀어내도 나는 사랑한다고, 세상이 그를 버려도 나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십 년간, 서아진은 정말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썼다.
제일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내며 부모님에게 무시당하면 따듯하게 안아주고 형님이 괴롭히면 편을 들어주고 주여린 때문에 힘들어 술을 퍼부으면 부드럽게 타일렀다.
“신지환,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어.”
신지환을 심연에서 끌고 나온 건 서아진이었고 신지환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며 사랑을 믿기에 이르기까지 쭉 곁을 지켰다.
그러다 작년에 신지환이 프러포즈했다. 이제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3개월 전, 주여린이 원작의 남자 주인공과 이혼하고 귀국했다. 그 후로 신지환의 마음은 다시 주여린에게로 향했다.
“아진아?”
신지환은 서아진이 멍때리는 걸 보고 가볍게 불렀다. 정신을 차린 서아진이 신지환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
덤덤한 말투는 서아진 본인조차 놀랄 정도였다. 신지환은 예상외로 너무 조용한 서아진을 보며 넋을 잃었다.
전에는 약속을 어기면 무조건 속상해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따져 물었는데 말이다.
“신지환. 네 마음속에 나는 몇 번째야?”
하지만 지금은 그저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 괜찮아?”
신지환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응.”
서아진이 웃었다.
“이제 가자.”
서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들고 옷을 갈아입으러 향했다. 그때 드레스샵의 문이 다시 열리더니 주여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보리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주여린은 긴 웨이브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고 정교하게 화장한 모습이 너무 예쁘고 아련했다.
신지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어쩐 일이야?”
“오늘 일은 들었어.”
주여린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강아지 찾아준다고 아진 씨와 한 약속에 늦었다면서? 마음에 걸려서 직접 아진 씨에게 사과하려고 왔어.”
그러더니 서아진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진 씨, 정말 미안해요. 지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러니까 탓하려면 나를 탓해요.”
서아진은 그런 주여린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여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여자 주인공인 주여린은 늘 부드럽고 착해서 보호해 줘야 했고 어떤 상황에서든 억울한 쪽이었다.
오직 서아진만이 주여린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가식적인지 알았다.
신지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의 사랑과 기여를 즐겼고 약혼녀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친구라는 명목으로 그의 시간과 감정을 이용했다.
다만 신지환은 보아내지 못했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맞았다.
“아진 씨?”
주여린은 서아진이 대답하지 않자 한 번 더 불렀다.
“괜찮아요.”
서아진이 말했다.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요.”
“잠깐만요.”
주여린이 말렸다.
“미안해서 그러는데 식사라도 같이 할까요? 사과하고 싶어서요.”
“괜찮아요.”
서아진이 말했다.
“가자.”
신지환이 대신 대답했다.
“너도 하루 종일 기다리느라 배고팠을 텐데.”
서아진이 그런 신지환을 힐끔 쳐다봤다.
서아진은 신지환이 그녀가 배고플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주여린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이런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요.”
서아진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주여린은 제일 비싼 스카이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통유리로 눈부신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와 너무 예뻤다. 다만 서아진은 좀처럼 기분이 나지 않았고 그저 신지환의 옆에 앉아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두 사람의 유년 시절부터 공동지인, 그리고 주여린의 외국 생활까지, 분명 함께 앉아 있는데도 동떨어진 사람처럼 끼어들 수가 없었다.
메뉴를 주문한 신지환은 뭐가 생각났는지 가방에서 돌돌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서아진에게 건넸다.
“아진아. 이거 받아.”
신지환이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는데 이걸로 보상이 됐으면 좋겠다.”
서아진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산수화였는데 붓칠이 섬세할뿐더러 경지가 심오했고 오른쪽 아래에는 자그마한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서아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은사님의 유작이었다.
그림을 확인한 순간 서아진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신지환을 바라보던 서아진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찾은 거야?”
“오래 찾아다녔어.”
신지환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서아진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마음에 들어. 고마워.”
서아진은 정말 너무 기뻤다. 은사님은 서아진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끌어준 고마운 분이었다.
생전에 어떻게든 이 그림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아진은 그 뒤로 쭉 이 그림의 행방을 찾아다녔고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했는데 신지환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아진은 그림을 보는 순간, 신지환이 약속을 어겨 쌓였던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조금은 그녀를 신경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주여린이 그림을 찬찬히 살피더니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잘 그렸는데?”
그 말 한마디에 신지환이 서아진의 손에서 그림을 앗아가더니 주여린에게 건넸다.
“마음에 들어? 그러면 너한테 줄게.”
서아진의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그리고 신지환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던 신지환이 그녀가 오랫동안 찾아 헤맨 그 그림을 아무렇지 않게 주여린에게 건네는 모습을.
신지환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래왔다.
주여린이 흥미를 보이면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아진이 좋아하는 물건임에도 바로 주여린에게 내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