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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햇살이 좁은 기숙사 방으로 쏟아져 들어온 그때 심민지는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어쩐지 꿈속에서 열이 났던 게 현실처럼 느껴지더라니... 감기에 걸린 데다가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였다. 시간을 확인한 순간 심민지는 놀란 나머지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망했어, 망했어. 지각이야.” 호텔에서 2년 넘게 일하면서 지각한 적이 없었고 병가를 낸 적도 없었다. 일어났다가 어제 정직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장실로 들어가 씻었다. 양치하고 나와 보니 룸메이트인 주여진도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여진아, 오늘 아침 근무 아니었어? 왜 아직도 기숙사에 있어?” 주여진은 심민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전에 자주 봤던 경멸 섞인 눈빛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바람에 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지금 이 옷차림이 오해를 사기 쉬운 건 사실이었다. 어제 숙취 해소제를 미리 먹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기숙사에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젯밤에 바에서 술을 좀 많이 마셨어.” 심민지가 팔을 킁킁거렸다. 술 냄새가 몸에서 진동했다. “샤워하고 출근해야겠어.” 주여진은 그녀를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 주여진이 갑자기 흥미를 보이며 말을 걸었다. “민지야, 너랑 2년 동안 같이 살면서 늦게 들어온 거 처음 봐. 혹시 남친 생겼어?” “아니. 그냥 볼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주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얼굴도 예쁜데 왜 남자를 안 만나?” 심민지가 웃으며 답했다. “아직 인연이 안 닿았나 보지.” “우리 호텔에도 널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 그런데 왜 남친이 있다고 했어?” 사실 심민지는 남자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었다.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는 게 상대를 거절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현재 그녀에게는 6억 원에 달하는 빚이 있다. 매달 갚는다고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수십 년은 갚아야 했다. 인생이 절망적인 심민지에게 있어서 연애는 사치였다. 만약 누군가와 만난다 해도 그 사람에게 짐만 될 뿐이었다. 하여 그녀는 아버지가 출소한 후 아버지와 평범하게 살 수 있기만을 바랐다. 이런 망가진 인생을 가진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사랑을 하겠는가? 심민지의 미소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아직 젊잖아. 당분간은 연애할 생각이 없어.” 오늘따라 주여진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피스룩으로 갈아입은 다음 출근했다. 출근한 심민지를 본 변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출근했네? 문제는 다 해결했어?” “어느 정도는 해결된 것 같아요.” 아직 해고당하지 않았고 호텔에도 아무 소문이 돌지 않은 걸 보면 성지태가 약속대로 그녀를 놓아준 것 같기도 했다. 변석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정말. 이따가 성신 그룹 사람이 오는데 희라 씨가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민지 씨가 나랑 같이 가자. 성 대표님이 여기 관광 코스를 둘러보고 싶다고 하셨거든.” 도희라는 성신 그룹 창립 기념 행사의 메인 영업 담당이었다. 원래는 도희라가 직접 안내해야 하는데 바쁠 때는 같은 부서 사람들이 서로 돕곤 했다. 리엔 호텔은 산 중턱에 위치한 오성급 호텔로 관광 명소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호텔 투숙객 대부분이 관광을 위해 이곳을 선택했다. 어제 성지태가 역겹다고까지 했으니 오늘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저 성 대표님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말에 변석주는 심민지와 성지태 사이의 갈등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짐작했다. 하여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가서 일 봐.” 변석주는 골프 카트를 몰고 빌라 구역으로 가서 성지태를 태웠다. 그는 변석주의 뒤쪽을 힐끗 쳐다보고서야 말없이 골프 카트에 올라탔다. 그의 미묘만 움직임을 살피던 변석주가 떠보듯 물었다. “원래는 동료랑 같이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대표님 투어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저 혼자 왔어요. 지금 출발하시죠.” 이동하는 내내 변석주는 백미러로 성지태의 표정을 살폈다. 왠지 풀이 죽은 듯한 모습이었다. 검지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다가 성지태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대표님, 오늘 특별히 보고 싶은 관광지가 있으신가요?” 성지태가 영혼 없이 대답했다. “아무 데나 구경하죠, 뭐.” “아이고, 이걸 어쩌나? 전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잘하고 저의 동료는 길가 풍경을 감상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두 분 취향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 친구 한번 불러볼까요?” 성지태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심민지가 사무실에 앉아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관광지 입구로 나오라는 변석주의 전화를 받았다. 영업팀이라 관광객들을 데리고 구경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심민지는 변석주가 성지태를 챙기느라 다른 고객을 돌볼 겨를이 없어 부른 줄 알고 곧장 나갔다. 그런데 관광지 입구에 도착해보니 변석주와 성지태, 그리고 성지태의 비서가 함께 서 있었다. 어제 다시는 성지태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만약 성지태가 화라도 낸다면 어젯밤에 술을 마신 게 헛수고가 될 터.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찰나 변석주가 심민지에게 손짓하더니 골프 카트 키를 심민지의 손에 쥐여주었다. “전무님이 급히 부르셔서 가봐야 해. 민지 씨가 대표님이랑 비서님 좀 구경시켜드려.” “부장님...” 심민지가 뭐라 하기도 전에 변석주는 난감한 표정의 심민지만 남겨둔 채 휙 가버렸다. “대표님, 제가 다른 직원을 불러드릴까요?” 성지태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골프 카트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본 소준혁 역시 그를 따라 카트에 탑승했다. 변석주가 절대 제멋대로 결정했을 리 없었다. 심민지를 불렀다는 건 성지태의 묵인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어젯밤의 그 괴롭힘이 시원치 않아 오늘 다시 이어가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민지는 키를 꽉 쥔 채 자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카트에 올랐다. 성지태를 그저 일반 고객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녀는 이동하면서 최대한 성실하게 코스에 대해 설명했다. 성지태가 그녀를 어떻게 괴롭히든 모두 감수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안녕하세요, 대표님. 이제부터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곳은 관광지 입구이고 이 지역의 특색에 맞게 설계한...” 그녀가 ‘대표님’이라고 부른 순간 성지태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더니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스쳤다. 심민지는 성지태를 보지 않으려 애썼으나 그의 기세가 너무나 강렬해서 뒤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녀는 가속 페달을 가볍게 밟아 출발했다. 잠시 후 첫 번째 관광지에 도착하자 골프 카트를 천천히 멈춰 세웠다. “저 앞 관광지에 요즘 유명해진 다리가 있는데 한번 가보시겠어요?” 성지태는 긴 손가락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피우지는 않고 의자에 나른하게 등을 기댄 채 말없이 먼 산만 응시했다. 소준혁이 골프 카트에서 내려 멀리 가버리더니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심민지는 초조한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꽉 잡았다. 뭘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지 않고 골프 카트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이 호텔에서 2년 넘게 일하면서 고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골프 카트가 지붕만 있는 개방형 구조인데도 심민지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유일한 장점이라면 다른 사람이 없어 성지태가 그녀의 전과 사실을 지금 폭로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지태가 손에 쥔 담배가 다 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후 성지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자.” 심민지가 고개를 살짝 돌려 물었다. “소 비서님 아직 안 오셨는데 기다릴까요?” “걔 안 올 거야. 그냥 가자.” 소준혁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에 심민지는 갑자기 1분이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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