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허 교수님, 지원자 찾을 필요 없어요. 이번 실험은 제가 직접 할게요.”
임서희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허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슈퍼칩을 뇌에 심으면 되돌릴 수 없어. 넌 슈퍼칩을 만든 사람이긴 하지만 호렌 그룹의 안주인이기도 해. 이런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 없단 말이야.”
호렌 그룹의 안주인?
예전에는 그토록 바랐던 그 자리가 이젠 미련도 감정도 없다.
“이 슈퍼칩은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에요. 지원자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거예요. 이미 결정한 일이니까 실험은 7일 후에 하는 걸로 하죠.”
국가 첨단 연구센터에서 나오는데 박도운한테서 문자가 왔다.
[로열 클럽 88호 룸으로 와. 10분 안에.]
또 술에 취해서 뒷수습을 하러 오라는 문자였다.
잠시 후, 룸에 도착해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임서희에게로 쏠렸다.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 박도운은 술한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값비싼 양복 차림을 한 그가 소파 가운데 나른하게 앉아서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여대생 류가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시간 맞춰 왔네.”
박도운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임서희 뒤에 있던 문이 경호원에 의해 세게 닫혔다.
임서희는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소파 앞으로 갔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박도운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그가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임서희를 쳐다보았다.
“가희 신발을 깨끗이 닦아줘. 가희가 웃으면 넥타이 일은 그냥 넘어갈게.”
넥타이...
임서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제 손빨래를 하다가 류가희가 그에게 준 넥타이를 망쳐놨다. 그 일로 박도운은 그녀를 5시간 넘게 무릎 꿇고 베란다에 있게 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릴 줄은 몰랐다. 류가희 저 여자의 신발을 닦으라고 하다니...
룸 안 사람들의 시선이 임서희에게 집중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날 이리 모욕하는 건 당신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거예요.”
“모욕하는 줄은 알고 있네. 많이 발전했군.”
말을 마친 박도운은 품에 안긴 류가희를 꽉 끌어안았다. 임서희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신발 닦아. 더 이상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박도운의 말투에 원망이 가득했다. 그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임서희는 잘 알고 있었다.
결혼식 당일, 박도운의 첫사랑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첫사랑 때문에 박도운은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뜻밖에도 임서희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박충수는 손자한테 결혼을 강요했다.
그 이후로 박도운은 할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을 모두 임서희에게 쏟아부었다.
그의 원한을 그녀는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죽은 첫사랑을 대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소파에 앉아 그와 거침없이 애정행각을 벌이는 류가희를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신, 첫사랑 잊지 못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여자 때문에 날 괴롭혀요? 사랑이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간 건가?”
첫사랑이라는 세 글자에 박도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을 것 같군. 혼 좀 내줘야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박도운은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룸 안의 스크린이 갑자기 켜졌고 화면에는 임서희의 사진들이 나타났다.
교복 차림, 바니걸 룩... 섹시한 차림을 한 모습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박도운 앞에서만 입었던 노골적이고 파격적인 옷들...
눈동자가 움츠러든 임서희는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룸 안의 스크린이 도화시의 모든 인터넷 TV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방금 그녀의 사진은 도시 전체에 쫙 퍼지게 되었다.
부잣집 도련님들은 순식간에 들끓어올랐다.
“서희 씨가 이렇게 재밌게 노는 여자인 줄은 몰랐어. 박 대표, 참 복도 많아.”
“박 대표, 더 파격적인 건 없어?”
박도운은 임서희의 창백한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있지. 어떤 걸 원해? 공유해 줄게...”
“당신... 어떻게...”
심장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도운은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꺼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생각할 시간 줄까?”
넋이 나간 임서희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신발 닦을게요.”
어차피 그동안 그한테 시달리면서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박도운의 만족스러운 눈빛 아래, 그녀는 경호원이 건네준 깨끗한 수건을 건네받았다.
룸 안이 순식간에 들끓었다. 임서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값비싼 크리스탈 신발을 위아래로 닦았다. 손끝이 미친 듯이 떨렸고 1분 1초가 너무 치욕스러웠다.
먼지 하나 없이 신발을 깨끗하게 닦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만족해요?”
박도운은 고개를 숙이고 품에 안긴 류가희를 향해 물었다.
“널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이젠 별장으로 들어올 거야?”
여태껏 임서희가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류가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박 대표님, 전 대표님과 함께할 수 없어요. 가난한 대학생인 건 맞지만 내연녀가 되는 건 싫거든요. 저 그런 짓 못 해요.”
“그래?”
잠시 고민하던 박도운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이혼을 하면?”
이혼이라는 말이 무거운 돌처럼 임서희를 짓눌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운 씨, 잘 생각해요. 박씨 가문의 남자는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했어요. 벌을 받아...”
“서희 씨가 박 대표한테 푹 빠졌네. 박 대표가 벌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하고 있나 봐.”
누군가의 비꼬는 소리가 임서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박도운은 그녀를 한 번도 자신의 아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임서희는 이 가정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자신을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니까...
9살이 되던 해, 임서희는 외국 조직에 의해 프릭쇼에 잡혀갔고 기형 인간으로 변하는 순간, 박충수와 박도운이 그녀를 구해줬다.
당시 18살이었던 박도운이 그녀에게 다가와 단단한 팔로 상처투성이인 그녀를 품에 안고는 다정하게 위로했다.
“꼬맹아, 겁먹지 마.”
그때의 따뜻함 때문에 임서희는 그를 12년 동안 사랑했다.
그 후, 뜻밖의 임신으로 박도운과 결혼하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한테 끝없이 모욕당하고 수없이 상처를 받았어도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고 그가 조금의 상처도 받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박도운은 이미 그 당시의 그녀를 잊고 있었고 지난 3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그의 마음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박도운은 옆에 있는 와인 잔을 집어 들고 천천히 흔들었다.
“널 버리겠다고 한 적 없어. 할아버지한테 이혼을 요구할 사람은 너일 테니까.”
“네가 나한테 약을 먹이고 내 아이를 가진 덕분에 3년 동안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잘 먹고 잘살았잖아. 이젠 만족해야지.”
그의 비난에 임서희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날 약을 탄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여러 번 해명했었다. 그날, 그가 걱정되어 호텔방으로 들어갔고 뜻밖에도 박도운의 해독제가 되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소파에서 류가희와 깍지를 끼고 있는 박도운의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박도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첫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싫은 것이었다.
12년 동안의 사랑과 3년 간의 결혼 생활을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어차피 7일 후면 뇌에 슈퍼칩을 이식하게 될 것이다.
성공하게 되면 그녀는 과학 연구계에서 최고가 될 것이고 만약 실패하게 되면 그녀의 생명도 수술대에서 끝이 나게 될 것이다.
박도운과 일찍 끝내는 것도 좋은 일일 것 같았다.
임서희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이혼 얘기는 내가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