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경매장 밖 50미터쯤 떨어진 모퉁이에 이르자 흉악한 목소리가 찬바람과 함께 임서희의 귀에 들어왔다.
“박 대표가 오늘 경호원을 네 명밖에 안 데리고 왔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상대방 쪽에서 가격을 두 배로 올렸으니까 오늘은 반드시 처리해야 해.”
임서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박 대표...”
‘설마 박도운인 걸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임서희는 경매장 방향으로 뛰어갔다. 십여 명의 남자들이 흉기를 들고 가로등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아래에는 바로 박도운이 서 있었다.
그는 주변의 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길가에 우뚝 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고 류가희는 발끝을 세우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아주 친밀해 보였다.
그런 광경에 가슴이 아파할 새도 없이 임서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도운 씨, 뒤 조심해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박도운은 몸이 굳어졌다.
다시 눈을 들어 보니, 도로 중심을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에 등 뒤에서 다가오는 칼날이 번쩍이고 있었다.
눈빛이 매섭게 변한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렸고 십여 명의 흉악범이 급히 달려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이지 말고 목숨 살려둬.”
박도운이 침착하게 명을 내리자 길가의 차 안에서 열 명 정도의 경호원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흉악범과 몸싸움을 벌였다.
임서희는 구석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서 십여 명의 흉악범들이 경호원에게 제압당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제야 깨달았다. 박도운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곁에 있는 경호원들은 모두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혼자서 열 명은 거뜬히 제압하는 사람들이니 그녀가 걱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한편, 류가희는 그의 품에 안겨 몸을 떨고 있었다.
박도운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어두운 눈빛으로 임서희를 주시하고 있으면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녀한테 당장 꺼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박도운은 류가희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이내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가 빠르게 지나갈 때, 임서희의 마음도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싸늘한 바람이 소리 없이 쓸쓸한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기침을 하던 그녀는 결국 피를 토했다.
그를 위해 달려왔던 자신의 모습이 박도운에게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하늘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쓸쓸히 몸을 돌린 임서희는 비를 맞으며 별장 쪽으로 걸어갔다.
넋이 나간 채 네온이 반짝이는 거리를 지나갔고 차가운 빗물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차들과 사람들이 옆을 오가고 있었고 그중 한 대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그녀의 뒤편 1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를 천천히 따라오면서 묵묵히 앞쪽 진흙탕과 어두운 밤길을 비추었다.
별장의 보안 구역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야 그 차는 조용히 떠났다.
온몸이 흠뻑 젖은 임서희는 엄청 낭패한 모습이었고 별장의 가정부조차 하마터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사모님...”
가정부의 목소리가 임서희의 귀에 떨어졌다. 그녀는 듣지 못한 듯 젖은 신발을 들고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갔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밤을 가르고 새벽 2시의 밤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져 임서희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아이 방에서 들려왔다.
“아악...”
박이윤의 목소리였다.
빛을 잃었던 임서희의 눈동자가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몸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녀는 정신없이 아이 방으로 달려갔다.
아이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켰다.
아이는 가드레일에 둘러싸인 큰 침대에 앉아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으앙...”
아이는 천둥번개를 제일 무서워했다.
“이윤아, 엄마 왔어. 괜찮아.”
앞으로 달려가 안전 가드레일의 스위치를 향해 손을 뻗는데 갑자기 베개 하나가 날아와 얼굴에 부딪혔다.
눈물에 젖은 박이윤의 두 눈은 미움으로 가득 찼고 아이는 그녀를 향해 울부짖었다.
“저리 가요. 아줌마 싫어요.”
가슴이 찢어진 임서희는 눈물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윤아, 전에도 번개 칠 때는 내가 널 안아주었어.”
“이젠 필요 없어요.”
아이는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죽어도 아줌마는 싫어요.”
“이윤아...”
임서희는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그 순간, 또다시 천둥번개가 쳤다.
침대 위의 아이는 더욱 심하게 울었고 천둥소리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잔뜩 겁을 먹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싫어요. 아빠한테 갈 거예요. 아빠..”
“아빠... 흐윽... 아빠 어디 있어요?”
절망적인 울음소리를 들으며 임서희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아빠 찾아올게.”
비에 젖은 몸을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임서희는 박도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는 계속 끊어졌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고 마침내 99번째로 건 전화가 연결이 되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입을 열기도 전에 들려온 것은...
“하아... 대표님, 살살해요... 저... 처음이란 말이에요.”
애교 섞인 류가희의 목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같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아들의 울음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아빠... 흐윽...”
임서희는 모욕적인 소리를 무시한 채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한테 애원했다.
“도운 씨, 집에 와요. 제발...”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그녀의 애원에도 멈추지 않았다.
임서희는 침대에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어대는 아들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도운 씨, 제발요. 날 모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아이가 계속 울고 있어요. 아빠를 찾고 있다고요....”
“도운 씨.”
목이 쉬고 힘이 다 빠져 멘붕 직전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전화기 너머로 응답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건 류가희의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무릎을 꿇고 백 번 절을 하면 집에 돌아가는 걸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요.”
‘절을 백 번 하라고?’
온몸이 굳어진 임서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천둥소리가 울렸다. 가슴을 찢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백 번 절을 해서 아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스피커폰을 클릭한 뒤, 임서희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차가운 바닥에 이마가 부딪히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선명하게 전해졌다.
쿵.
“도운 씨, 제발요...”
쿵.
“날 미워하고 갈기갈기 찢어놔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이윤이를 모른 척하지 말아요. 이윤이는 당신의 아들이에요.
“제발 돌아와요. 우리 아들을 안아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