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나는 돌아서서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비굴한 연승훈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눈이 쓰라렸다. “유지안 씨, 상처 좀 나아졌어요?” 아래층의 여자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지못해 말했다. “많이 나아졌어요...” 연승훈이 내 말을 끊었다. “괜찮아. 그냥 살짝 부딪힌 거야.” 나는 비웃었다. “연승훈, 내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너는 코빼기도 안 비쳤잖아. 내가 괜찮다는 걸 어떻게 알아?” 연승훈의 얼굴빛이 가라앉았다. “유지안, 그만해.” “그만?” 나는 웃었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나를 위해 한마디만 보태도 네 눈에는 다 소란이지?” 혐오가 그 순간 정점에 닿았다. 사라진 7년 동안 나는 분명 이런 연승훈의 무심한 ‘소란’, ‘요란 떨기’, ‘철없다’ 같은 딱지를 붙이는 태도에 번번이 분노했을 것이다. 내가 감정이 안정적일 리가 없다.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때 진슬기가 고개를 들어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가볍게 인사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예요?” 진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서러운 기색이 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안 씨, 저는 사과하러 왔어요. 제가 승훈이랑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고 오해한 거죠.”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눈가가 벌겋게 젖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련했다. 딱 불쌍하다 싶은 모습이었다. 나는 막 비꼬는 말을 던지려 했다. 이때 갑자기 누가 밖에서 뛰어 들어와 나를 세게 밀쳤다. “유지안, 또 못되게 굴지 마. 네가 자살한다고 뛰어내린 건데 슬기 누나가 무슨 잘못이야? 왜 누나한테 사과하라면서 몰아붙여?” 세게 밀리는 바람에 나는 뒤로 넘어갔다. 격통이 허리에서 치솟았고, 발뒤꿈치도 내 것이 아닌 듯 아팠다. 나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저 사람이 진슬기...?” 소문으로만 들었던 진슬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살폈다. 진슬기가 나를 부축하려 다가왔지만, 나는 분명 그녀의 눈 밑으로 스친 고소한 기색을 보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계속 사과를 쏟았다. “지안 씨, 미안해요. 어디 다쳤어요? 연재혁은 아직 애예요. 제발 탓하지 말아 줘요.” “연재혁?” 그제야 나를 세게 밀쳤던 그 소년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연재혁...” 이름은 짐작이 갔다. 얼굴이 연승훈과 아주 닮았으니까. 그는 연승훈의 친동생이었다. 연재혁은 성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작은 늑대 새끼 같은 눈으로, 나를 가죽 벗기고 뼈를 발라 진슬기에게 사죄라도 할 기세였다. 나는 계단 난간을 잡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연재혁은 경계하듯 진슬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조금만 뭐라도 하면 목숨 걸고 달려들 기세였다. 나는 말없이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의 셋은 한동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연승훈은 아마 내가 울고불고할 걸로, 진슬기는 내가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나면 변명을 늘어놓을 걸로 생각했겠지. 연재혁은 더 놀랐을 것이다. 내가 미친 듯이 그까지 싸잡아 욕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를 줄 알았을 테니까. 모두 폭풍을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쾅 닫았다. ... 나는 연승훈은 잊었지만, 연재혁은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연재혁은 내 외사촌 서진호의 같은 반 친구였으니까. 18살의 기억 이전에, 연재혁은 내 사촌 옆에서 누나를 연발하며 살갑게 굴었다. 그때 연재혁은 아직 어렸고 몸도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유씨 가문이 운영하는 고급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어느 여름방학, 나는 그 요양원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고, 마침 그가 홀로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 “어? 꼬마야, 너 혼자니?” 나는 맛있는 것을 한가득 들고 가서 인사를 건넸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연재혁이 나를 경계했지만, 같은 반 친구의 외사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함께 어울렸다. 그 여름방학은 즐거웠고 빨리도 지나갔다. 나는 줄곧 연재혁이 진심으로 나를 누나로 여긴다고 믿었는데, 방금의 그 경계하는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가 나를 민 힘은 그리 세지 않았지만, 나는 너무 아팠다. 마르고 외톨이 같던 소년이 어린 시절 자신에게 가장 잘해 주던 누나를 자기 손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문득 얼굴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등으로 훔치니 얼굴이 눈물로 가득했다. 나는 천천히 눈물을 닦았다. ‘제길... 연승훈이 난리 칠 때도 울지 않았는데, 정작 연재혁 그 못된 꼬맹이 때문에 울다니. 이 집에는 하루도 더 못 있겠어.’ 나는 담담히 눈물을 훔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 아래층, 내가 보지 못하는 작은 거실에서. 진슬기는 죄책감 서린 얼굴로 말했다. “승훈아, 내가 올 때가 아니었나 봐. 지안 씨가 정말 화난 것 같아. 가서 달래는 게 어때?” 연승훈은 낮고 묵직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원래 저 모양이야. 며칠만 지나면 또 괜찮아져.” 그의 눈빛에 짜증이 스쳤다. 줄곧 말이 없던 연재혁이 불쑥 말했다. “슬기 누나, 다음부터는 혼자 오지 마. 유지안 그...” 원래는 ‘유지안 그 미친 여자가 누나를 다치게 할 거야’라고 하려다가 이상하게도 방금 위층으로 올라가던 유지안이 자신을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지독한 실망,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 연재혁은 고개를 젓고, 그 낯선 감정을 짜증스럽게 털어냈다. 어쩐지 지금의 유지안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유지안이 갑자기 날뛰어 진슬기를 해치지 않도록 막고 싶었을 뿐이다. 일부러 유지안을 민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봤을까?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연재혁이 툭 내뱉었다. “형, 슬기 누나 데려다줘. 여기는 내가 지켜. 그 미친 여자는 내가 볼 거야.” 진슬기는 몹시 미안해했다. “재혁아, 고마워. 너처럼 어린애가 지안 씨 꾸중을 어떻게 견디나 몰라. 하... 재혁아, 기회가 되면 나 대신 지안 씨한테 사과해 줘. 더는 오해가 깊어지면 안 돼.” 연재혁의 눈에는 감격이 가득했다. “슬기 누나, 누나는 아무 잘못 없어. 전부 그 미친 여자가 누나한테 뒤집어씌운 거야. 누나는 스스로를 잘 지켜. 형이랑 나도 지켜 줄게.” 진슬기의 눈동자에 만족이 어렸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래. 그럼 난 갈게.” 그녀는 말없이 있던 연승훈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승훈아, 굳이 안 데려다줘도 돼. 혼자 호텔까지 갈 수 있어. 호텔이 좀 외지기는 해도 나 혼자서도 괜찮아.” 진슬기는 걱정스럽게 위층을 힐끗 봤다. “넌 일단 올라가서 지안 씨를 달래. 그때 유씨 가문 자금을 네 쪽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네 회사가 그렇게 쉽게 고비를 넘기지는 못했을 거야. 지금 좀 버릇없이 굴어도 정상이지. 조금만 참고.” 연승훈은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회사가 고비를 넘긴 것이 전부 그 여자 공은 아니야. 나랑 직원들이 버텨내지 못했다면,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빛에 혐오가 짙어졌다. “앞으로 그 얘기 꺼내지 마. 유지안이 그걸 빌미로 평생 날 굽신거리게 만들 생각이면 턱도 없으니까.” 연승훈은 말을 마치고 차 키를 집어 들고 진슬기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가자. 밤길에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해. 내가 데려다줄게.” 연재혁도 걱정되는 듯 말했다. “슬기 누나,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