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3화

최정희가 이씨 집안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심가은은 끼어들 틈이 없어 정원 쪽으로 나왔다. 이씨 가문은 강성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답게 정원도 널찍하고 웅장했다. 한참을 걸어 다니다 조금 지친 심가은은 눈에 들어온 그네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런데 곁의 울타리 위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백이현과 주서연, 영원히 함께하자.] 글씨체가 서툰 걸 보니 분명 어린 시절에 새긴 흔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자랐으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겠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 오빠, 내가 사는 집 공사를 다시 해야 해서 당분간 못 들어가.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 잔소리만 들을 것 같고... 오빠 집에 잠깐 지내면 안 돼?” 백이현의 대답은 주저함조차 없었다. “당연하지. 네 방은 지금도 그대로 비워놨잖아.” 순간 심가은의 손이 그넷줄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함께 사는 집의 가장 크고 햇살 좋은 방이다. 늘 정리되어 있고 며칠마다 새 침구로 갈아놓던 그 방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방을 왜 이렇게까지 관리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그 방은 원래부터 주서연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 장례식이 끝난 뒤, 심가은은 백이현을 따라 걸었다. 그는 여전히 휴대폰만 바라본 채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고 심가은 역시 굳이 말 걸 마음은 없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건 그저 계약 때문일 뿐이었으니까. 그때 뒤에서 주서연이 다가와 당연하다는 듯 그의 팔에 손을 걸었다. “이현 오빠, 먼저 우리 집에 가서 짐 챙기면 안 돼?” 백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심가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은아, 서연이가 당분간 우리 집에 머물 거야. 넌 요즘 할 일도 없잖아. 그동안 서연 잘 챙겨줘.” 지시처럼 들리는 백이현의 말투에 심가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무 순순히 대답한 탓인지, 백이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깃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분명 티가 났을 텐데 오늘은 감정 하나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백이현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서연을 태웠고 심가은이 타려고 하자 백이현이 말했다. “나 먼저 서연이 집에 들렀다가 갈 거야. 가는 길이 달라서 넌 택시 타고 들어가.” 이씨 가문 저택은 산 위에 있어 택시를 부르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백이현은 아무렇지 않게 주서연만 태우고 떠나버렸다. 심가은은 찬 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 넘게 서 있어야 했다. 결국 평소보다 두 배 넘는 요금을 내고서야 겨우 기사가 잡혀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배가 고파 속이 쓰리고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식탁 위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백이현과 주서연, 백수민이 둘러앉아 훠궈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백수민이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언니는 어디서 놀다 온 거예요? 집에 아무도 밥을 안 해서 결국 우리 훠궈 먹고 있잖아요.” 백이현은 건져낸 고기를 주서연 그릇에 올려주고 나서야 심가은을 돌아봤다. “장 집사가 만든 소스가 별로야. 부엌에 가서 다시 좀 만들어 와.” 옆에 있던 장미숙은 난처하게 고개를 숙였다. 원래 밥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백이현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은 집안일만 맡고 있었다. 심가은이 집에 없던 동안, 그의 취향을 몰라 준비한 음식이 입에 안 맞자 부득이 훠궈를 한 것이었다. 심가은은 장미숙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 새로 소스를 만들어 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수민이 다시 심부름을 시켰다. “언니 우리 동그랑땡 좀 해줘요. 밖에서 파는 건 다 인공 첨가물 투성이라 맛없단 말이에요.” 이미 지쳐 있던 심가은은 그저 자리에 앉아 끓고 있던 감자며 어묵, 고기 완자들을 자기 그릇에 담았다. 백수민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내가 부탁한 거 못 알아들었어요? 대답 좀 해요.” 심가은은 고기완자를 하나 입에 넣고서야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게 다 인공이라며? 그래서 내가 먼저 대신 먹어 준 거야. 직접 만들어 달라는 거라면 오늘은 안 되겠네. 재료도 없고. 필요하면 네가 사 와.” 백수민은 화가 나 목이 막힌 듯 말문이 막혔다. 곧장 형에게 하소연하려 했지만 백이현이 먼저 말을 잘랐다. “먹기 싫으면 네가 배달시켜.” 평소 같았으면 언제나 백수민 편을 들어줬을 백이현이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주서연을 집에 들이는 문제를 순순히 받아들인 심가은이 기특해 보였기에 굳이 백수민을 두둔해 갈등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수민은 더 말도 못 하고 씩씩거리며 고기를 씹었다. 그러나 심가은은 잠시도 착각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넘어가 줄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 백이현의 입에서 새로운 지시가 흘러나왔다. “서연이가 좋아하는 건 전복 죽이야. 좀 번거롭긴 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 둬.” 심가은은 힘을 주어 젓가락을 움켜쥐었다. 역시나 백이현에게 주서연은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동생은 무시해도 되지만 주서연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심가은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입으로는 쉽게 대답했지만 정작 맛이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주서연은 새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언니 부탁드려요.” 심가은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자기 그릇 속 고기완자만 조용히 집어 먹었다. 이미 완자를 전부 건져 넣은 탓에 백수민은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다 심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을 노려, 일부러 젓가락으로 뜨거운 국물을 툭 쳤다. 펄펄 끓던 국물이 튀어 심가은 쪽으로 쏟아졌다. 그녀는 급히 몸을 피했지만 팔은 피하지 못했다. 순간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덮쳤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하지만 백이현은 심가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주서연이 손등에 튄 국물 자국만 보고는 다급하게 일어섰다. “많이 아프지?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그는 주서연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백수민도 심가은을 향해 비웃는 눈길을 던지고는 따라나섰다. 식탁에는 심가은과 장미숙만 남았다. 장미숙은 얼른 다가와 심가은을 부축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벌겋게 부푼 물집을 보자 장미숙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사모님...” 심가은은 고통을 참아내며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 장미숙이 택시를 잡아 심가은을 백이현의 회사가 투자한 개인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가 화상 부위를 치료해 주고 간호사가 링거까지 연결해 주었다. 그러나 장미숙은 저녁이면 손자를 돌봐야 했기에 심가은은 무리하지 말고 돌아가라며 혼자 남았다. 링거대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다 간호사의 부름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수액이 다 떨어져 있었다. 짐을 챙겨 나가려던 순간, 옆자리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들었어? 위층 VIP 병동 전부를 백 대표님이 통째로 빌렸다더라. 주서연 씨 편히 쉬라고.” “겨우 손등에 조금 튄 건데? 빨리 치료 안 했으면 금세 흔적도 안 남을 상처잖아. 그럴 일인가?” 발걸음을 멈춘 심가은은 허탈하게 자기 팔을 내려다봤다. 물집이 가득한 피부가 따갑게 욱신거렸지만 그 어떤 위로나 배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온 심가은은 씻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직 잠결에 있을 때 백이현이 불러 깨웠다.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드니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어제 뭐라고 했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전복죽 준비하라고 했지. 근데 죽은 어디 있어?”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