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임지현,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뜨겁게 달아오른 남자의 손이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는 순간, 숨이 막혀 왔고 창백해진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몸부림칠수록 남자의 손아귀는 더욱 세게 조여왔다.
남자가 몸을 숙여 다가오자, 임지현은 심연처럼 가라앉은 그의 두 눈을 마주 봤다. 이후로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듯했다.
이내 동굴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낮고 음습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너는 내 곁에 둘 거야.”
짧게 끊긴 숨이 흉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임지현은 그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고 식은땀이 이마와 등 뒤를 타고 흘러내렸다.
또 그 꿈이었다. 삼 년째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악몽이었다.
눈을 뜨고서도 한동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던 임지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곁에는 이윤이가 자고 있었다. 작은 몸을 웅크린 채 깊이 잠든 아이의 숨결이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의 호흡을 확인하고서야 임지현은 비로소 경직됐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세 시간 뒤면, 임지현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터였다.
과거를 정리하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한 그 선택을 떠올리며 임지현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고쳐 덮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쿵... 쿵...”
급한 노크 소리가 적막한 새벽을 가르며 울렸다. 고요가 깊을수록 소리는 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임지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확인했다.
이윤이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들의 규칙적인 숨결을 들으니 놀란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임지현은 까치발로 문 앞까지 다가가 도어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봤다.
호텔 객실 직원의 유니폼이 먼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안심한 듯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는 순간, 시야 한가운데로 스며든 얼굴에 숨이 멎었다.
‘육현재?’
꿈에서 수없이 보아 온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임지현은 본능적으로 문을 다시 밀어붙였지만, 바깥에서 미는 힘이 훨씬 더 셌다.
문이 거칠게 열리자 막고 있던 임지현은 뒤로 튕겨 나가 바닥에 넘어졌다.
“임지현, 오랜만이네.”
육현재는 쓰러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 안에는 어둡고 뜨거운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 위로 차갑게 식은 집착이 덧씌워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광기 어린 기쁨이 번뜩였다.
“여긴 왜 왔어? 우리는 이미 끝났잖아.”
임지현은 몸을 일으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친형제처럼 지내던 놈이 전처랑 결혼한다는데, 내가 축하하러 오는 게 그렇게 이상해?”
육현재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한 발 들여놓으며 시선을 방 안쪽으로 흘렸다. 마치 그 안에 누가 더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이... 아이는 안 돼.’
임지현은 그보다 한발 앞서 문을 닫았다. 손가락이 굳게 말려들었지만, 얼굴에는 긴장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축하하러 온 거면 결혼식장으로 와. 일단 지금은 돌아가. 난 널 환영하지 않으니까.”
임지현은 문 앞을 막아섰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육현재가 손을 뻗었지만 임지현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
순간, 그의 턱선이 단단히 굳었다. 입술이 가늘게 닫히며 감정이 눌렸다.
“얼굴 좀 풀어.”
목소리는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임지현은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섬뜩하게 다가왔다.
“너랑 나는 이미 이혼했어. 이제 각자의 삶을 살자고. 당장 나가. 안 그러면 경찰부를 거야.”
임지현은 물러서지 않고 육현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을 비틀던 순간, 육현재의 입술이 거칠게 덮쳐왔다.
피할 틈도 없이 덮쳐온 키스였다. 뜨겁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읍...”
가쁜 호흡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육현재는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입술 가장자리에 피가 남아 있었다.
“여전히 앙큼하네.”
육현재는 손등으로 피를 가볍게 훔치며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등 뒤로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놔, 육현재. 미쳤어?”
임지현은 분노에 차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몸부림칠수록 그녀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무엇보다 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다. 방 안에서 자는 아이를 떠올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육현재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3년 동안 억눌러 왔던 욕망이 오늘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나서 다른 손은 자신을 밀어내던 그의 손목을 쉽게 낚아채 등 뒤로 꺾었다.
“뭐 하려는 거냐고?”
비웃음 섞인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3년이야. 1000번의 넘는 밤을 버텼다고. 내가 뭘 하려는지 몰라서 묻는 거야?”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며 내려왔다. 뜨거운 숨결이 민감한 피부 위로 닿자, 임지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하려 고개를 틀었지만, 그의 입술은 정확히 목에 닿았다. 순식간에 남은 그의 이빨 자국에 임지현은 숨을 들이켠 채 또다시 굳어 버렸다.
“너 진짜... 야!”
욕설은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의 거친 손끝이 어느새 옷자락 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허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육현재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긴장으로 굳은 몸 위에 뜨거운 불씨가 떨어지는 듯했다.
“쉿.”
육현재는 경고하듯 속삭였다. 그의 입술은 쇄골을 따라 다시 올라와, 이번에는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처음처럼 거칠기만 한 키스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린 듯 간절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키스였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밀어내던 임지현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말려들었고 숨이 점점 가빠졌으며 머릿속이 멍해졌다.
몸이 먼저 반응하며 저항하려는 의지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육현재는 그녀를 들어 올려 소파 위에 눕혔다. 무거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고 이마가 맞닿은 채 두 사람의 숨결이 뒤섞였다.
그의 숨은 거칠었고 눈동자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안에는 임지현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욕망 한가운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섞여 있었다.
“지현아...”
육현재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그 자식이랑 결혼하지 마.”
그 말은 무방비 상태에서 임지현의 가슴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그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심연 속에서 집착과 광기 말고도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서질 듯한 나약함과 간절함이 보였다.
“육현재,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우리는 이미 끝났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 안 어딘가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곧이어 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엄마... 엄마...”
임지현의 몸이 떨렸다. 흐려졌던 시선이 단번에 초점을 되찾았고 가슴을 짓누르던 감정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다.
‘깼어... 이윤이가 깼어!’
“너랑 걔 사이에 생긴 애야?”
육현재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분노라기보다는 억눌러 둔 질투가 건드려진 듯 날이 선 목소리였다.
“놔. 애가 들을 수도 있어.”
임지현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마음은 다급했지만 조금 전까지 이어졌던 혼란스러운 상황 탓에 온몸에 힘이 빠져 있었다.
놓아달라는 그녀의 말은 설득이라기보다 절박한 부탁에 가까웠다.
“애가 들을까 봐 걱정되면 조용히 해.”
육현재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그 말에는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공포에 질린 임지현의 모습은 길을 잃은 어린 양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서 멈춰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가 눈앞에 다시 나타난 순간부터 그는 자제력을 잃어갔다.
임지현의 바르르 떨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육현재, 제발... 제발 좀 그만해.”
그녀는 어금니를 깨물고 부탁했다.
임지현은 결국 처음과 달리 누그러들어 있었다.
육현재도 그걸 눈치챘지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폭풍 같은 키스를 이어갔다.
그 사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 울음소리는 임지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임지현은 소파 위 담요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육현재의 힘이 느슨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흐트러진 옷을 급히 정리한 뒤 그대로 침실로 달려 들어갔다.
임지현이 다가와 끌어안자, 아이는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엄마 여기 있어. 이윤아, 괜찮아... 울지 마.”
후끈 달아오른 탓에 숨이 가빴지만, 최대한 평온한 척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거실에 남은 육현재는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낮은 울음과 아이를 달래는 임지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힘든 불쾌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울렸다.
“지현 씨, 저예요. 잠들었어요?”
문을 두드린 사람은 임지현의 약혼자, 고서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