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임지현은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앉아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따라 시선을 옮길 뿐,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투명 인간처럼 외면했다.
그녀는 이윤이도 데려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아이만 곁에 있으면 어디서든 탈출할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육현재는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아이와 그녀가 함께 밖으로 나가는 상황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윤이는 그녀를 묶어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인질이었으니까.
이 상태로는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육현재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붙었다.
그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임지현은 더 이상 한때 자신만 바라보던 그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한때 나만을 담고 있던 그 눈빛이 지금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육현재는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녀를 다시 무너뜨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차량이 레드카펫 앞에 멈춰서자, 육현재가 직접 내려 차 문을 열었다.
순간 연회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안성 그룹 대표이사가 여자를 차에 태운 것도 모자라 직접 문까지 열어 주다니.’
불과 작년, 접대 자리가 끝난 후 육현재의 호텔 방에 여자를 들여보냈던 어리석은 이가 있었다.
그 여자는 육현재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한 채 쫓겨났고 일을 꾸몄던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그 선을 넘으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연회장에 모인 모든 시선은 하나같이 임지현에게 쏠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애쓰고 있었다.
임지현은 과할 만큼 세심한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육현재는 하이힐이 불편할까 염려해 미리 차 안에 플랫슈즈를 준비해 두었을 정도였다.
차에서 내리던 순간, 임지현이 발목을 다칠뻔하자 육현재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그는 직접 그녀의 발에서 하이힐을 벗기고 플랫슈즈를 신겨 주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한때 냉정하기로 이름난 육현재가 불과 몇 달 사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저 여자는 누구야? 처음 보는데.”
“자세히 보니 사모님이랑 닮아 보이는데?”
사람들이 입에 올린 ‘사모님’은 육현재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 심연아였다.
그녀가 사라진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러니 임지현이 육현재의 곁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그 얼굴 때문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사모님은 아니야. 실종된 지 벌써 3년이나 됐잖아.”
“우리가 아는 사람은 아니겠네?”
“설마... 숨겨둔 애인인가?”
육현재의 오랜 지인 몇을 제외하고는 임지현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전 송씨 가문의 송도진은 너무 놀라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현재 형이...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그 옆에서 흰 정장을 입은 진이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송도진이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설마... 임지현 씨?”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잇지 못했다.3년 전 사라졌던 임지현이 다시 육현재의 곁에 서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플랫슈즈로 갈아 신은 뒤에야 임지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육현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발 삔 건 아니지?”
그러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임지현은 그 손을 무시하고 아무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고개를 들고 레드카펫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육현재는 서두르지도 멈춰 서지도 않은 채 안경을 고쳐 썼다.입가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옅은 웃음이 스쳤다.그는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보란 듯이 임지현의 허리를 감싸안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현재 형, 지현 씨...”
송도진이 임지현을 가리키려는 순간 육현재가 담담하게 말을 끊었다.
“형수님이라고 불러야겠지?”
위압감이 느껴지는 협박 같았다.
임지현은 즉시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그녀의 눈가에 분노가 스쳤지만 육현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잠시 후, 육현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려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은 임지현은 소파에 앉아 가볍게 술잔을 기울였다.
음악이 바뀌자, 한 남자가 다가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한 곡 괜찮으실까요?”
“안 됩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떨어졌다.남자는 고개를 돌려 육현재의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고는 황급히 물러났다.
육현재는 임지현 앞에 서서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공주님, 한 곡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임지현이 망설이다가 손끝을 그의 손바닥 위에 얹는 순간 육현재는 그녀를 단번에 끌어당겼다.
은은한 재스민 향이 숨결에 스며들며 오랫동안 눌러 두었던 집착에 불을 지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려오지 말 걸 그랬네.”
그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건드렸다.가장 민감한 곳에 그의 손길이 닿자, 임지현은 순간 정신이 흐트러졌다.
“누가 팜므 파탈 아니랄까 봐.”
육현재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든 듯,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지탱한 채 음악에 맞춰 무대로 걸어갔다.음악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다시 자리로 향했다.
그때였다.
“지현 씨?”
임지현의 발걸음이 멈췄다.고서원의 목소리임을 알아챈 그녀는 쉽게 뒤돌아볼 수 없었다.
‘정말... 서원 씨가 왜 여기에...’
그제야 임지현은 오늘 밤 육현재가 굳이 이 자리에 그녀를 데려온 이유를 알아챘다.
육현재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함께 고서원의 앞으로 걸어가자는 듯 힘을 주었지만, 임지현의 발은 바닥에 붙은 듯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왜 안 가?”
그는 일부러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육현재, 일부러 나를 데려온 이유가 이거야?”
육현재를 올려다보는 임지현의 눈가가 희미하게 붉어졌다.
‘나를 얼마나 형편없는 여자로 만들 셈이야...’
“이제 와서 화내는 거야?”
육현재가 피식 웃었다.
“보고 싶던 사람 아니었어?”
그러고는 태연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서원아, 오랜만이다?”
육현재의 팔은 여전히 임지현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고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자, 육현재의 손에도 힘이 실렸다.
“형!”
고서원의 시선은 임지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형수님한테도 인사해야지.”
육현재가 웃으며 말했다.
임지현의 허리를 감싼 손에 다시 한번 힘이 실렸다.그야말로 말 없는 선언이었다.
“형수님이라고?”
고서원이 잠시 멈칫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형수님은... 심연아 씨 아닌가?”
그 이름이 입에 오르는 순간 임지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소식이 많이 늦나 보네?”
육현재는 가볍게 웃으며 임지현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잘 봐. 육씨 가문의 명실상부한 안주인이 누군지.”
그리고 짧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바로 임지현이야.”
육현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부러 고개를 숙여 임지현에게 키스했다.
임지현에게는 순식간에 들이닥친 거침없는 키스였다.반박을 허락하지 않는 강압적인 키스는 공개적인 선언이자 벌칙에 가까운 돌발행동이었다.
임지현은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을 밀치며 벗어나려 했다.그러나 키스가 끝난 직후, 육현재는 그녀의 귓가에 이마를 가볍게 기댄 채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밤, 이윤이랑 같이 자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임지현은 더 이상 육현재를 밀어낼 수 없었다.
‘육현재... 넌 정말 비열한 인간이야.’
욕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겉으로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낼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그저 다정한 부부가 은밀히 귓속말을 속삭이는 모습이었으니까.밀어내는 손짓조차, 연인의 장난처럼 보일 만큼 다정해 보였다.
고서원의 눈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은 듯했다. 턱선이 단단히 굳었고 늘어뜨린 손은 주먹을 쥔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진이섭과 송도진이 웃으며 다가와 자연스럽게 좌우에서 고서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현재 형, 그동안 잠수 타더니 이제야 얼굴 비추네? 네 얼굴은 기억은 하고 있었어?”
두 사람의 가벼운 장난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던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렸다.주변의 숨 막히던 기류도 조금씩 풀어졌다.
육현재는 임지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현아, 다 아는 사이지? 굳이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는 없겠네.”
그러고는 친구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다들 잘 들어. 앞으로 지현이는 명실상부한 너희 형수님이다.”
그의 시선이 스치듯 고서원에게 머물렀다.
“형수님 대접 제대로 해, 깍듯하게!”
겉으로는 그녀의 지위를 세워 주는 말이었지만 분명한 경고가 숨겨져 있었다.정확히 고서원을 겨냥한 말이었다.
“당연하지, 형! 근데 형, 우리랑 술 한 잔 안 한 지도 꽤 됐잖아. 같이 한잔할까?”
진이섭이 웃으며 그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자 육현재가 냉담한 눈길을 던졌다.
“와이프랑 같이 있는 거 안 보여? 나이만 먹고 눈치는 안 늘었네.”
“형, 오래간만에 보는 우리보다 매일 붙어있는 형수님이 더 중요해?”
송도진도 거들었다.
“가 봐. 난 괜찮아.”
임지현이 가볍게 그의 팔을 밀었다.
“그래. 잠깐 다녀올게. 답답하면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육현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야 자리를 떴다.
임지현은 잠시 혼자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옮기던 중, 술잔을 들고 가던 직원과 스쳐 지나치며 일부러 몸을 살짝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거 고서원 씨에게 몰래 전해 주세요.”
임지현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급한 김에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 하나를 빼 직원의 손에 빠르게 쥐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