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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날 밤 내내 임지현은 육현재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했다. 침실 문은 안쪽에서 잠겼고 육현재는 문밖에 남겨졌다. 문 앞에 선 육현재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눌러앉아 있었다. 고서원에게 귀걸이를 건넨 건 임지현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침실 문 앞에 섰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늘 결단이 빠르던 그가 처음으로 망설임을 배웠다. 그러나 끝내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날 밤, 육현재는 서재 소파에서 밤새 뒤척였다. 텅 빈 품 안에 익숙하던 온기가 없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의식은 초조함과 각성 사이를 떠돌았다. 날이 밝아올 즈음, 그는 충혈된 눈을 비비며 침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안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임지현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피로가 깊게 내려앉아 있었고 눈 아래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공기가 잠시 멎었다. 육현재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망설이다가 뱉은 말은 무심한 척 꾸민 한마디였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 그는 속으로는 잠깐 생각했다. ‘혹시 지현이도 잠을 설쳤을까. 나의 온기에 익숙해진 탓일까.’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건 임지현이었다.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가 섞여 있었다. “이윤이 데리러 갈 거야. 혼자 밖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어. 아직 너무 어려.” 말을 잇는 동안 눈가가 붉어졌다. 피로와 걱정이 겹친 표정이었다. 누구라도 연민을 느낄 법한 모습이었지만, 육현재의 가슴에 스쳤던 온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그녀의 지친 기색은 육현재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육현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다른 아이들이랑 잘 놀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윤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임지현이 고개를 저었고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가 곁에 없으면 무서워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거라고.” 그녀는 어딘가에 웅크린 채 엄마를 찾으며 울음을 삼키는 아이를 떠올렸다. 상상이었지만 그 장면만으로도 가슴이 조여 왔다. “알겠어.” 육현재가 한발 물러섰다. “지금 바로 데려다줄게. 대신 아침은 꼭 먹어.” 이 부분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임지현의 손목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탁에 앉혔다. 식탁에는 이미 도우미가 차려둔 아침이 놓여 있었다. 임지현은 한동안 멍하니 바라볼 뿐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입맛에 안 맞아?” 육현재가 드물게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임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음이 급해서 그래.” “아무리 급해도 안 돼.” 육현재의 시선이 그녀 앞의 접시로 내려앉았다. “이건 다 먹어야 해. 안 그러면 못 가.” 그녀는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 단호한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더 버텨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임지현은 젓가락을 들고 맛을 느낄 여유 따위는 없이 꾸역꾸역 삼켜냈다. 접시가 비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자.” 너무 급한 나머지, 입가에 묻은 음식을 닦지 못했다. 육현재가 뒤따라 일어서며 닦아주려 했다. “잠깐만.” 그는 냅킨을 들어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다. 미지근한 손끝이 스치자, 임지현이 잠시 멈칫했다.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듯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 “됐어.” 육현재는 냅킨을 내려놓고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가자.” 그는 임지현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 육현재는 이윤이를 자연 농장으로 운영되는 여름 캠프에 보냈다. 겉으로는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인근에 머물며 아이를 살피는 보호자들이 적지 않았다.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나원이는 캠프에서 이윤이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녀의 부모 역시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이른 아침, 공용 화장실에서 아이들이 줄을 맞춰 서서 제법 그럴듯하게 세수하고 있었다. “이윤아, 네 부모님은 왜 한 번도 보러 안 오신 거야?” 나원이가 옆 세면대로 바짝 다가와 손수건을 빨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여기 온 거 모르실 거야.” 이윤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수건을 정성스럽게 헹구고 있었다. “모르신다고? 엄마가 아니면 누가 데려다준 거야?” 나원이는 더 궁금해진 얼굴이었다. 비누 거품이 통통한 볼에 묻어 크림을 훔쳐 먹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이윤이의 머릿속에 늘 무표정하던 ‘나쁜 아저씨’의 얼굴이 스쳤다. 그는 입술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윤이는 부모님이 안 계신 거 아닌가?” 옆에서 김다올이 갑자기 소리쳤다. 김다올은 캠프에서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뭐라고? 나도 엄마 있거든?” 이윤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가가 금세 달아올랐다. “김다올, 그런 말 하면 안 돼!” 나원이가 이윤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빨리 사과해!” 김다올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홧김에 나원이를 밀쳤다. 나원이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윤이는 친구가 밀려나는 걸 보자, 주먹을 쥔 채 김다올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후, 화장실 안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소란을 듣고 캠프 교사 이채연이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다들 울고 있죠?” 교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서 있는 이윤이를 발견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애써 버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채연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윤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한테 이야기해 줄래요?” 이윤이는 또박또박 있었던 일을 차례대로 설명했다. 이채연은 훌쩍이는 나원이를 바라봤다. “나원아, 이윤이 말이 맞아요?” 나원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다올아,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요. 나원이를 밀친 것도 잘못이에요. 두 친구에게 사과해야 해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어린아이가 느끼기에도 분명한 훈계였다. “싫어요! 쟤네가 먼저 밀친 거라고요!” 김다올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우리 아빠 대기업 지사 총괄이에요. 말만 하면 선생님도 잘릴 줄 알아요!” 김다올은 그렇게 소리치고는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캠프 교사 이채연은 뒤쫓아가려다 멈췄다. 눈앞에 눈물에 젖은 두 아이가 있었기에 한숨을 삼키고 먼저 아이들을 달래기로 했다. 한참을 애써서야 나원이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두 아이를 자리에 앉혀 놓고 김다올을 찾으러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두들겨졌다. 방 전체가 울릴 만큼 큰 소리에 아이들은 놀라 숨을 죽였다. 이채연이 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조금 열자마자, 누군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말 한마디 없이 손이 먼저 올라갔고 날카로운 소리와 이채연의 뺨을 후려쳤다. 이채연은 휘청거리며 한발 물러섰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귀가 먹먹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김다올의 부모였다. 손을 댄 쪽은 김다올의 어머니였다. 눈을 치켜뜬 채 분노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왜, 왜 때리세요?” 이채연은 뺨을 감싸 쥐고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그들을 쏘아봤다. “때릴 만하니까 때렸지!” 여자는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당신이 무슨 교사야? 편파적으로 굴기나 하고! 말해 봐, 이윤이라는 아이가 당신 아들이야? 그래서 그렇게 감싸?” 말투는 거칠고 무례했다. 막 대학을 졸업한 이채연은 그런 모욕은 처음이라 온몸이 떨렸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그리고 왜 반말이세요! 다올이가 먼저 막말했고 나원이를 밀어서 울린 건 사실이에요. 저는 사과하라고 했을 뿐이에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우리 다올이가 얼마나 착한데!” 김다올의 어머니는 허리에 손을 얹고 소리쳤다. “다올이가 잘못할 리 없어! 잘못한 건 이 아이들이지. 분명 먼저 우리 다올이를 괴롭혔을 거야!”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때, 김다올의 아버지가 훌쩍이는 다올이를 안고 성큼 들어왔다. 그는 이채연을 아예 지나쳐 겁에 질린 아이들을 훑어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까 누가 우리 아들 괴롭혔어?”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부둥켜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이들이 무서워해요.” 이채연이 막아서려 했지만 김다올의 어머니가 팔을 세게 붙잡았다. “다올아, 괜찮아.” 김다올의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있잖아. 걱정하지 마. 자, 말해. 아까 누가 너 괴롭혔어?” 김다올은 코를 훌쩍이며 짧은 팔을 들어 올렸다. 이내 방 한쪽에 서 있던 이윤이를 정확히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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