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유다정은 지금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백도운이 한유설과 함께 우산을 쓴 것도 짜증 났고 한유설 안 젖게 하겠다고 자신이 반쯤 젖은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또한 오은지가 불렀을 때 이번에야말로 한유설이 제대로 혼나는 줄 알았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기는커녕 뭐 좋은 말을 들었는지 배시시 웃고 오은지마저 미소를 지으며 한유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꼴불견이었다.
유다정은 심해원을 짝사랑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나머지 세 명의 남주들도 자신의 거라는 이상한 소유욕 같은 것이 있었다.
계속해서 투덜대던 우주한은 고개를 돌렸다가 도우미들 사이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끼고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기 싸움을 처음 보게 된 그 날 이후부터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도우미들을 구경하곤 했었다. 기 싸움 자체가 재밌을 뿐만 아니라 영감을 찾는 데 도움도 됐으니까.
정수연은 우산을 정리한 후 우주한의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손길이 닿기도 전에 우주한에 의해 제지당해 버렸다. 우주한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터치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우주한은 물기를 깔끔하게 턴 후 새로운 기 싸움 같은 건 없어 보이자 재미없는 듯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조정욱은 비를 맞은 네 명을 위해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홍차를 준비한 다음 유일하게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됐던 한유설에게 가져다주라고 시켰다.
마침 오늘이 과일 당번이었던 한유설은 별말 없이 홍차를 서빙 카트에 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제일 먼저 그녀는 심해원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심해원의 허락에 한유설은 천천히 문을 열며 말했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홍차입니다. 어디에 놓으면 될까요?”
심해원과 우주한은 며칠 후 라이브 방송이 있어 특히 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했다.
“탁자 위에 두세요.”
심해원은 기타를 만지는 데 집중하느라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유설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티 코지를 살짝 벗겨두었다. 그래야 음악에 심취하다 갑자기 홍차를 마셨을 때 너무 뜨겁지 않을 테니까.
심해원은 그 움직임에 그녀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사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묘하게 움직임이 여유롭고 또 부드러워 매번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한유설은 할 일을 마친 후 그의 일에 방해되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방을 나섰다.
심해원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예전에는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요즘은 확실히 다른 도우미들과 달리 눈에 띄려고 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다른 도우미들은 그가 기타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늘 대화를 해보려고 시선을 끈다거나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칭찬해대는데 한유설은 눈치껏 조용히 사라져주니까.
백도운과의 일이 있기는 했지만 변화가 좋은 건 사실이었다.
한편 한유설은 그 시각 이미 우주한 방의 문을 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주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한유설은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후 금방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천천히 드세요.”
“잠깐만요.”
우주한의 부름에 한유설은 뒤로 돌며 물었다.
“네.”
“한유설 씨는 왜 여기로 취직했어요?”
“페이도 좋고 복지도 좋아서요. 그리고 요즘은 과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우주한은 예상했던 답변이 아닌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뭐, 솔직하게 얘기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요.”
역시 믿지 않는 눈치였다.
“솔직하게 얘기한 겁니다.”
‘믿지 않겠지만.’
우주한은 피식 웃으며 한유설의 눈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운이 꼬시려고 했던 사람이 그런 말 하니까 좀 웃기네요.”
한유설은 그 말에 말문이 막힌 듯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그건 며칠 전 일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우주한은 닫힌 문을 보며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잘리지 않으려면 그렇게 대답해야지.”
우주한의 방에서 나온 한유설은 다음 순서로 온시열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노크를 하려고 보니 이미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허락의 말에 한유설은 찻잔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홍차예요. 천천히 드세요.”
온시열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한번 보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한유설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아, 잠깐.”
한유설은 뒤로 돌려다가 그의 말에 어정쩡하게 멈췄다.
“파스 좀 붙여줘요.”
“?”
‘파스? 어디 다친 건가? 얘기 못 들었는데?’
한유설은 잠깐 의아했지만 이내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파스는 어디 있어요?”
온시열은 눈치 있는 답변에 조금 풀어진 얼굴로 서랍을 가리켰다.
“서랍 안을 보면 있을 거예요.”
한유설이 서랍을 열어보자 확실히 그의 말대로 파스가 들어있었다.
그녀가 파스를 가지고 올 때 온시열은 천천히 셔츠를 벗고 있었다. 팔의 움직임에 따라 탄탄한 근육들이 움찔거리는 것이 꼭 영화 한 장면 같았다.
한유설은 그의 등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시퍼런 멍을 보며 물었다.
“이곳에 붙이면 될까요?”
위치 확인을 위해 그녀는 검지로 멍든 곳을 살짝 터치했다. 그 순간 온시열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고 한유설은 자신이 힘이 생각보다 셌나 싶어 당황해하며 급하게 손을 뗐다.
온시열은 몇 초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에 붙여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살살 붙이도록 할게요.”
한유설은 온시열이 원하는 위치에 파스를 붙이고는 손바닥으로 두어 번 눌렀다. 그런데 손을 거두어드릴 때 의도치 않게 살갗이 스쳐버렸고 온시열의 몸은 또다시 굳어버렸다.
한유설은 자신도 모르게 또 힘을 세게 줬나 하며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힘을 너무 세게 줬죠?”
“아닙니다.”
온시열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한유설은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별일 없을 것 같아 몸을 일으키며 나머지 파스들을 다시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수고했어요.”
“수고는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온시열은 한유설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해보았다. 부끄러워한다거나 하는 표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정말 딱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관계 같았다.
백도운과의 일로 반성을 좀 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한유설은 마지막으로 백도운의 방문을 두드렸다.
“집사님이 홍차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세 명과는 달리 백도운에게는 항상 누군가의 지시인지 확실하게 말해야 했다.
“들어오세요.”
차가운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한유설은 문을 연 후 마지막 찻잔을 들고 천천히 탁자 쪽으로 향했다.
백도운은 이제 막 샤워를 마친 듯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그는 평소 정장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 건지 다른 세 명에 비해 잠옷도 조금 더 포멀한 느낌이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한유설은 홍차를 내려놓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백도운이 흔치 않게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며 되물었다.
“아까 우산을 쓸 때 저 때문에 많이...”
“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백도운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에 한유설도 별말 없이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우산을 같이 쓴 일로 그녀는 백도운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다.
아무리 여자라도 불쾌한 경험을 준 상대를 위해 비를 절반이나 대신 맞아준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그는 냉랭한 겉모습과 달리 사실은 넷 중 누구보다 배려와 매너가 몸에 밴 남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