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그러나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이 말을 들어 먹을 리가 만무했고 한유설은 두 팔이 후들거릴 정도로 힘을 쓰며 어떻게든 그와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 차이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힘은 다 빠져가고 심해원의 숨소리는 여전히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한유설이 목까지 빨개지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그때, 문이 스르르 열리며 연락을 받고 온 유다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유다정은 소파에 깔린 한유설과 그 위로 몸을 겹친 심해원의 모습을 보고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두 사람 지금 무슨...”
그녀의 얼굴과 말투에는 속상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긴 줄곧 짝사랑해왔던 상대가 다른 여자와 딱 붙어 있으니 상처 입을 만도 했다.
한유설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곧바로 들려온 유다정의 목소리에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빨리 와서 심해원 씨 좀 부축해줘요. 숨을 못 쉬겠어요!”
한유설은 심해원의 몸 때문에 문 쪽을 볼 수 없었던 터라 유다정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유다정은 그녀의 말에 정신을 번뜩 차리며 얼른 뛰어가 심해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시 후, 무거운 인간의 몸이 드디어 사라지자 한유설은 살겠다는 얼굴을 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파에서 벗어났다.
정말 압사당하기 직전이었는지 숨소리도 거칠고 손과 발도 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고마워요.”
유다정은 고맙다고 말하는 한유설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유설은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는데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흐트러진 모습 때문에 더 넋을 잃게 만드는 것 같았다.
유다정은 심해원과 한유설이 단순한 사고로 몸을 겹쳤다는 건 이해했지만 마음은 영 좋지 않았다. 어찌 됐든 가까이 붙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물론 질투심이 가득한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뭘요.”
한유설은 뻐근한 팔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다 편히 누운 채 잠을 자고 있는 심해원을 한번 바라보았다.
침대로 옮기는 건 불가능할 듯 하니 이대로 소파에서 재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정 씨, 내가 지금 옷이 다 젖어있어서 갈아입고 오고 싶은데.”
욕실에서 따뜻한 물을 받고 나오던 유다정은 한유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갈아입고 와요.”
“고마워요. 그럼 잠시 수고해줘요.”
유다정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로서는 한유설이 이대로 올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오지 않는 게 더 좋았다. 심해원과 둘만 있고 싶었으니까.
한유설은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별다른 생각 없이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계단 쪽으로 가 얼른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올라오는 듯한 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하고 아래를 바라보자 거기에는 웬 남자 한 명이 이어폰을 꽂고 느긋하게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잘생겼지만 조금 날티 나는 얼굴을 한 그는 다름 아닌 또 다른 남주인 우주한이었다.
우주한은 계단 끝에 서 있는 한유설을 발견하고는 시선을 아래위로 훑었다.
한유설은 다른 도우미들과 달리 다리도 길고 가슴도 커 같은 유니폼을 입어도 핏이 다르며 조금 더 섹시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몸으로 홀딱 젖어있기도 하고 또 심해원에게 압사당하기 직전이었던 탓에 얼굴까지 달아올라 있어 더 시선을 끌었다.
우주한은 한유설을 2초간 바라보다 금세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계단을 올랐다.
한유설은 설마 이렇게도 딱 그와 마주칠 줄은 몰랐기에 조금 어정쩡한 모습으로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 줬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우주한은 한유설의 곁을 지나갈 때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저께 밤에 도운이 화나게 한 거 그쪽 맞죠?”
도우미 한 명이 커피를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백도운을 유혹하려다 가차 없이 방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는 이미 저택에 파다했다.
한유설은 기억을 훑으며 우주한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채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주한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피식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겠지만 한유설은 애초에 남주들과 엮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에 이대로 이상한 여자 취급을 하며 그쪽에서 먼저 피해 주는 것이 그녀에게는 훨씬 이득이었다.
우주한이 방으로 들어간 후 한유설도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곳 별장의 상주 도우미들은 꽤 복지가 좋은 편이었다. 일단 월급이 두둑한 건 물론이고 개인 방까지 마련되어 있으니까.
네 명의 남주들은 상주 도우미가 많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꼭 필요한 인원들만 저택에 두고 일부 도우미들은 출퇴근하는 형식으로 고용했다.
한유설은 방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유니폼은 몸에 딱 달라붙은 것이 아주 가관이었다.
“오후 내내 거지꼴로 하고 다녔네.”
한유설은 한숨을 내쉬며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느릿느릿 다시 방을 나섰다.
그녀가 다시 2층 방으로 돌아왔을 때 유다정은 심해원의 손과 목 부분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
유다정은 다시 들어온 한유설을 보더니 영 마음에 안 드는지 타올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한유설은 천천히 소파 쪽으로 다가가 바닥에 놓인 세숫대야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욕실로 가 따뜻한 물로 바꾸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유다정의 옆에 내려놓았다.
유다정은 그녀의 행동에 그제야 조금 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심해원을 돌보는 데 집중했다.
한유설은 유다정의 미세한 표정 변화 같은 건 인지하지 못했지만 유다정이 은근히 심해원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꼈다.
그도 그럴 게 도와줄 거 없나 하고 고개를 살짝 기웃대면 그때마다 이상하게 몸을 틀며 심해원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으니까.
한유설은 유혹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려다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못 본 척 조금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방에 가 버리고 싶었지만 매니저가 직접 부탁한 거라 심해원이 깰 때까지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유다정은 아무 말 없이 세심하게 심해원의 몸을 닦아 내렸고 거의 다 닦았을 때 한유설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세숫대야를 욕실로 가져가며 정리를 했다.
1분도 안 걸리는 일을 5분이나 뭉그적거린 그녀는 욕실에서 나올 때도 느릿느릿 걸으며 나왔다.
어차피 이제는 할 일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유다정은 한유설이 욕실에서 나오든 말든 다시 자리에 앉든 말든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을 심해원의 얼굴에 고정한 채 이따금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줄 뿐이었다.
‘그렇게도 좋을까.’
한유설은 독자가 된 기분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다정은 심해원을 짝사랑하면서도 그 특유의 다정함을 심해원뿐만이 아니라 다른 세 명에게도 공평하게 나눠줬었다.
독자였을 때는 그 포인트가 매우 좋았었지만 악녀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니 상당한 욕심쟁이 여주가 아닐 수 없었다.
동시에 네 명의 남자들의 사랑을 얻으려 한 거니까.
소나기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자 따뜻한 햇볕이 창문을 뚫고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분위기가 너무 나른했던 탓일까, 한유설은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결국 단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