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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한유설이 음식을 먹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고 유다정이 들어왔다. 그리고 몇 분 뒤 정수연도 의혹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먼저 와 있는 유다정을 보더니 금세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언니, 벌써 일 다 끝냈어요?” 그러자 유다정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다. “해원 씨가 나 배고플 것 같다고 이만 가보라고 했어. 안 그래도 되는데.”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조용히 식사하는 한유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머, 진짜요?” 정수연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유다정은 도우미 중에서 남자 네 명과 얘기를 제일 많이 나눠 본 사람이라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심해원 씨는 언니한테 유독 더 다정하신 것 같아요. 저랑 유설 씨는 맨날 차가운 눈빛만 받는데.” “마음을 다해 모시면 언젠가는 그분들도 수연 씨 마음을 알아주실 거예요.” 유다정은 힘내라는 듯 정수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그럴게요. 성심성의껏 모셔서 꼭 저를 신뢰하실 수 있게 노력해볼게요!” “네, 파이팅.” 유다정은 냉장고로 걸어가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유설을 바라보았다. 방금 한 얘기는 사실 정수연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는 한유설에게 간접적으로 네 명의 남자들이 자신을 얼마나 다르게 대하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한유설은 유다정의 시선도 느꼈고 유다정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계속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시기와 질투가 기본으로 장착된 악녀가 아닌 그저 기한을 마저 채우고 한시라도 빨리 이 저택에서 나가고 싶은 ‘한유설’일 뿐이었으니까. 한유설이 빠르게 그릇을 비워가고 있던 그때 정수연과 유다정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저 가까이 앉기만 할 뿐 대화는 자기들끼리만 주고받으며 한유설은 끼워주지 않았다. 한유설은 혼자가 익숙한 성격이라 외롭다거나 하는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도 이렇게 무시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밥을 다 먹은 후 한유설은 느긋하게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늘 한유설에게 설거지를 맡겼던 정수연은 먼저 일어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먼저 일어나는 거지? 전에는 늘 자기가 먼저 다가와서 내 그릇까지 다 설거지해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정수연은 직접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설거지를 다 끝낸 후 손의 물기를 닦아내는 중인 한유설이 보였다. 정수연은 그릇을 손에 든 채 한유설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쯤 하면 눈치껏 밥그릇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한유설은 정말 이상하게도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크흠. 유설 씨, 혹시 온시열 씨한테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한유설은 갑작스럽게 날아든 이상한 질문에 발걸음을 멈췄다. “네, 알고 싶지 않아요.” 자신이 왜 그딴 걸 알아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 말문이 막힌 정수연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뻥긋거렸다. ‘언제는 알고 있는 정보가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달라 해놓고 왜 저런 표정이지?’ 정수연은 조금 뻘쭘한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결국 대놓고 얘기하기로 했다. “내 그릇까지 대신 설거지해주면 이따 백도운 씨 방으로 갈 때 말 좀 잘해줄게요. 그러면 내일은 내가 아닌 유설 씨가 방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죠.” 정수연은 한유설이 당연히 알겠다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너무나도 뻔뻔하게 자신의 그릇을 들이밀었다. 말을 잘해주겠다는 건 거짓말이다. 백도운이 그날 한유설을 얼마나 경멸 어린 시선으로 봤는데 똑같이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인 그녀가 한유설을 도와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유설은 정수연의 말에 그제야 그녀의 목적이 설거지라는 것을 깨닫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요.”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 정수연은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지금 거절한 거야?! 진짜? 백도운 꼬시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던 인간이? 혹시 타깃을 바꿨나...?’ 유다정은 안쪽으로 들어왔다가 벙찐 얼굴의 정수연을 발견하고 물었다. “왜 그래요?” 정수연은 복잡미묘한 얼굴로 유다정에게 말했다. “언니, 한유설 씨 말이에요.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정수연이 이상하다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유설은 저택으로 들어와 일하게 된 순간부터 늘 머리도 그렇고 화장도 그렇고 완벽하게 세팅하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오늘은 난데없이 생얼로 다니지 않나, 머리도 아래로 질끈 묶고만 있지 않나, 게다가 늘 뿌리던 독한 향수도 오늘은 아예 뿌리지 않았다. 물론 지금 모습이 더 예쁘긴 했다. 한유설은 의욕에 비해 손기술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까. 유다정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은지 씨가 자를까 봐 일부러 잠자코 있는 거 아닐까요?” 백도운과의 일이 오은지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잘리지 않기 위해서는 얌전히 있는 게 선명한 선택이었다. “제가 볼 때는...” 정수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을 계속 이어가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아무리 유다정과 친하다 해도 뭐든 다 얘기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뭔데요?” “아니에요. 잘리는 게 무서워서 태도를 바꾼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유혹하는 방식을 바꾼 건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만약 이 얘기가 오은지에게 흘러가면 동료 험담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찍힐 수 있으니까. “참, 그저께 있었던 일 말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유설 씨가 백도운 씨한테 다가가려고 일부러 그런 짓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유다정이 그릇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으며 갑자기 그저께 일을 입에 올렸다. “언니, 혹시 지금 유설 씨 편들어 주는 거예요? 그 상황이 어떻게 일부러가 아니에요. 딱 봐도 유혹하려고 들어갔구만.” 정수연은 유다정에게 왜 이렇게 순진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유다정이 한유설을 깎아내리려고 일부러 그 일을 들먹인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예쁘게 생긴 얼굴이라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이 풀어지는 건 알겠는데 절대 그 외관에 속아서는 안 돼요! 그리고...” 정수연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속삭였다. “유설 씨가 심해원 씨한테 찝쩍대지 못하게 잘 지켜봐요.” 그녀 역시 유다정이 심해원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다정은 심해원이 한유설 같은 발랑 까진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유설 씨가 아무리 남자를 좋아해도 설마 해원 씨까지...” 정수연은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쳤다. “언니는 정말 너무 착해서 문제라니까? 됐어요. 해원 씨 쪽은 내가 잘 지켜보고 있을게요. 유설 씨가 다가갈 틈조차 없게.” 유다정은 입만 움찔거리며 시선을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수연은 자신이 다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장담을 하고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유다정과 친해지기 위한 플랜을 짜고 있었다. 저녁. 오늘의 과일 담당은 한유설과 정수연이라 두 사람은 그릇들을 서빙 카트에 올려둔 후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올라가는 길,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유설은 계약이 끝나자마자 저택을 나올 생각이라 딱히 동료들과 친목을 다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럴 마음이 있다 해도 둔감한 그녀마저 알아챌 정도로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정수연인데 대화가 잘 통할 리가 없었다. 정수연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렇고 밖으로 나와서까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한유설을 보며 괜히 불쾌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유설 씨, 우리 먼저 백도운 씨 방부터 갈까요?” 정수연은 한유설이 기다린 말이 이거라고 확신했다. 한유설이 백도운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건 저택에 있는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유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대뜸 서빙 카트에서 손을 떼며 자리에 멈춰 섰다. “집사님이 백도운 씨 방은 수연 씨한테 맡기셨다면서요. 저는 온시열 씨 방으로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과일 그릇 하나를 손에 들고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가게 되면 백도운과 온시열의 방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심해원과 우주한의 방이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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