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그리고 유다정은 미소를 장착한 채 네 명의 남자들에게 우유를 따라주고 있었다.
그때 조정욱이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뒤에 서 있는 한유설에게 눈빛을 보내며 심해원의 뒤로 가보라고 했다.
다행히 아무도 시선을 주는 이가 없어 한유설은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심해원의 뒤로 향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음식이 하나둘 오르기 시작하고 한유설은 손을 뻗어 심해원의 앞에 티슈와 수저를 세팅해 주었다.
심해원은 익숙하게 챙김을 받다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편한 듯한 느낌에 분주하지만 여유로운 여자의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한유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할 일에만 집중하며 단 한 번도 심해원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에 심해원도 다시 시선을 돌리며 음식을 집어 먹었다.
유다정은 음식을 다 나른 후 당연하다는 듯이 심해원의 뒷자리로 가려다가 이미 한유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는 이를 꽉 깨물며 옆으로 물러섰다.
한유설은 갓 구운 빵 냄새에 괜스레 배가 고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해원의 맞은 편에 앉은 우주한은 식사를 빠르게 마친 후 고개를 들었다가 그제야 한유설의 존재를 알아챘다.
오늘도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우주한은 밥도 다 먹었겠다 심심하던 차에 그녀를 불러 장난이라도 칠까 하다가 백도운과의 일을 떠올리며 그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한유설은 우주한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네 명의 식사가 전부 다 끝난 뒤에야 다시 활기를 되찾으며 눈을 반짝였다.
이제 드디어 그녀도 식당으로 가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유설 씨, 나 좀 도와줄래요?”
목소리가 큰 건 아니었지만 주위가 너무 고요했던 탓에 식탁을 둘러싸고 있던 네 명은 물론이고 다른 도우미들까지 전부 한유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주한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해버린 한유설의 얼굴을 보고 순간 넋을 잃었다. 그다지 예쁜 표정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한유설은 유다정의 손에 든 그릇이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아슬아슬하게 있는 걸 보고는 얼른 뛰어가 그릇을 받아냈다.
“유설 씨 덕분에 살았어요.”
유다정이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한유설은 아무 말도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그릇을 카트에 올려주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도움이 필요해서 부른 건가 싶었는데 백도운의 싸늘한 눈빛이 미친 듯이 옆 통수에 꽂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부러 부른 것 같았다.
백도운은 금방이라도 화낼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예상외로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이닝 룸을 나섰다.
우주한은 그 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유다정의 눈동자에 어린 비웃음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도우미들끼리도 기 싸움과 신경전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심해원은 다이닝 룸을 나갈 때 몇 초간 한유설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한유설은 둔감한 편이라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릇 옮기는 거에만 집중했다.
네 명이 다 나가버린 후 도우미들은 각자 조용히 자기 할 것을 했다.
사실 정수연은 아까 백도운이 시원하게 화내주길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아쉽게도 재미있는 구경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매우 실망한 상태다.
“백도운 씨 반응을 보니까 이제 화도 다 풀린 것 같은데 내일은 유설 씨가 과일을 가져다주는 게 어때요?”
어젯밤에 봤던 싸늘한 그 눈빛을 정수연은 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두 번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갈게요.”
한유설이 입을 떼기도 전에 유다정이 말을 가로챘다.
“은지 씨가 당부했어요. 당분간 유설 씨는 절대 백도운 씨 방에 보내지 말라고.”
한유설은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할 일을 했다.
정수연은 유다정이 자신을 도와준 거라고 생각해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고마워요, 언니.”
“뭘요. 서로 돕고 하는 거죠.”
그 뒤로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한유설은 듣지 못했다. 그릇을 다 옮긴 후 빠르게 직원 식당으로 향했으니까.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한유설은 자리에 앉자마자 일단 두유부터 원샷했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려는데 포니 테일을 한 도우미 한 명이 바로 옆에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아까 백도운 씨가 화낼까 봐 식겁했죠?”
사실 윤세희도 정수연처럼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올랐었다.
한유설은 악녀의 기억을 훑으며 ‘윤세희’라는 이름을 찾아낸 후 덤덤한 말투로 얘기했다.
“딱히요.”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은 있지만 그다지 친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친구처럼 반응해줄 필요는 없었다.
윤세희는 퉁명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잠시 멈칫하더니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지 않았어요? 다정 씨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까먹었을 리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왜 하필 유설 씨한테 도와달라고 해요.”
윤세희는 정수연과 달리 유다정의 실체를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쁜 얼굴의 한유설이 들어왔을 때 드디어 상황이 조금 변하는가 싶어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유설은 얼굴만 예쁠 뿐 머리는 텅 비어있는 여자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스트레스가 두 배로 늘 것 같아 윤세희는 결국 단순한 한유설부터 꼬셔 유다정과 함께 이 저택에서 쫓겨나게 만들기로 했다.
한유설은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는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유다정이 일부러 그랬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백도운도 화를 내지 않았고 이미 지난 일이기도 했기에 굳이 들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가요?”
뭐든 좋다는 듯한 태도에 윤세희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왜 이렇게 태연해? 왜 화를 안 내지? 혹시 못 알아들은 건가?’
“유설 씨는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아까는 다정 씨가 일부러...”
“네, 알아요.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한유설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
‘안다고? 설마 지금껏 일부러 멍청한 척 연기한 건가? 하지만 왜? 하마터면 쫓겨날 뻔했는데?’
윤세희의 의심 가득한 눈빛 속에서 한유설은 마지막 한입까지 다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오늘 점심은 네 명의 남주들 모두 스케줄이 잡혀 있어 식사 시중을 들 필요가 없었다.
남주들은 지금 비활동기간이라 대부분의 시간을 작곡과 작사에 투자하고 있고 꼭 가야만 하는 일정만 간간이 소화하고 있다.
한유설은 그 생각만 하면 몹시도 아쉬웠다. 만약 활동 기간이면 연속 열흘, 아니, 보름 정도까지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지.’
한유설은 아쉬운 마음을 거두어들이고는 오후 내내 바삐 돌아치며 맡은 바 일을 했다.
그녀가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부엌은 남주들의 저녁 식사 준비로 한창이었다. 오늘은 식탁에 술도 추가될 거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음식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창문 너머로 차량이 연이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남주들일 게 분명했다.
현관문 쪽을 바라보니 발 빠른 유다정과 몇 명의 도우미들이 이미 마중을 나가 있었다.
그사이에 굳이 낄 필요는 없었기에 한유설은 느긋하게 앉아 체리를 다 먹은 후 그릇이 비고서야 천천히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남주들은 셰프가 올린 음식으로 이미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용히 뒤에 자리한 한유설은 오늘따라 유독 더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린 채 금방이라도 침을 흘릴 듯한 얼굴을 했다.
“유설 씨, 심해원 씨가 불러요.”
윤세희는 심해원이 부른 게 자신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한유설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며 심해원을 바라보았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심해원은 그녀의 시선이 음식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걸 이미 다 지켜보고 있었다.
“물수건 좀 주세요.”
한유설은 카트에 올려져 있는 물수건을 들어 곧바로 그에게 건네주었다.
심해원은 소스가 묻은 손을 닦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 식사 전인가 보죠?”
“네.”
식사 전인 건 맞지만 이미 체리를 한가득 먹었던 터라 그렇게까지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우주한이 풉 하고 웃었다.
“음식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길래 한 입 줘야 하나 엄청 고민했어요.”
백도운은 한유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1초도 안 돼 금방 다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굳어있고 미간도 살짝 찌푸려진 것이 여전히 한유설을 경멸하고 있는 듯했다.
한유설은 꽤 뻔뻔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있을 수 없었다.
우주한은 키득거리며 웃다가 한유설의 새하얀 피부가 서서히 핑크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분명히 파렴치한 여자인데 이상하게 자꾸 눈길이 갔다.
“자리 안 지켜도 되니까 식사하러 가세요. 나머지 분들도요.”
심해원의 말에 한유설은 마치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도 예뻐 우주한은 또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