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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온시열과 백도운이 다 나가버린 후 우주한은 한유설의 몸 상태를 살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주한 만큼은 한유설이 일부러 부딪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갑자기 일어나서 생긴 일이었으니까. 한유설은 아직도 아픈지 왼손을 들어 오른쪽 어깨를 마사지했다. 우주한은 옷 속으로 보이는 그녀의 흰 어깨와 깊게 파인 쇄골에 흠칫했다가 다시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평소라면 이러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번 건 확실히 그로 인한 것이었기에 조금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그는 바로 후회했다. 눈앞에 있는 건 백도운을 유혹하려 했던 파렴치한 여자였으니까. 만약 지금의 이 관심으로 그녀가 큰 착각을 하게 되면 그때는 매우 곤란한 일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한유설은 우주한이 예의상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해 눈도 안 마주친 채 답했다. “네, 괜찮아요.” 우주한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벙찐 얼굴을 했다. 한유설은 의자를 다시 식탁 쪽으로 밀며 고개를 들었다가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우주한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얼굴에 뭐 묻었나?’ 한유설은 볼을 매만지며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우주한을 바라보았다. “혹시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우주한은 그녀의 질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돌려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한유설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금 어깨를 주물렀다. 넷 중 감정 기복이 없고 늘 평온해 보이는 사람은 온시열 뿐이고 심해원은 겉으로만 매너 있지 실상은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게 당연한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우주한과 백도운은 전자는 기분파이고 후자는 겉도 속도 모두 차가운 냉혈한으로 따지고 보면 제일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어.’ 한유설이 남몰래 다짐하던 그때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다정과 정수연, 그리고 윤세희는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한유설이 일부러 온시열과 부딪쳤다고 생각했다. 한유설은 갑자기 눈빛이 달라진 그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해명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기에 그들을 무시하며 식탁 위를 정리하는 데만 집중했다. 잠시 후. 모든 정리를 마친 한유설은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유다정이 다가와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 “은지 씨가 메시지를 보냈어요. 유설 씨더러 백도운 씨한테 우유 좀 가져다주라고 하네요.” 유다정은 한유설이 온시열과 부딪혔다는 얘기를 그새 오은지에게 보고했고 이에 오은지는 유다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것이 아닌 일부러 백도운에게 우유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한유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 그녀가 네 명의 남자들에게 정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유설은 긴가민가한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단톡방을 확인해 봤는데 정말 오은지에게서 그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알겠어요.” 확인을 마친 후 그녀는 곧바로 부엌으로 가 따뜻한 우유를 컵에 따랐다. 유다정은 오은지의 시험에 한유설이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걸 100% 확신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내쫓을 기회였다. 한유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도착한 후 백도운의 방문을 두드렸다. “네.” 이건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한유설은 문을 연 다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먼저 허락부터 구했다. “은지 씨가 우유를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굳이 오은지의 이름을 댄 건 그녀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올 생각이 없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백도운은 프로젝트 기획서를 내려놓으며 한유설을 바라보았다. 미간이 찌푸려진 게 영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큰소리로 화를 내려는 것처럼은 안 보였다. 한유설은 우유만 건네주고 빨리 퇴근할 생각에 컵을 그의 책상이 아닌 문과 가까운 탁자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미련 없이 떠나려는데 백도운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 한유설은 몸을 돌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은 그녀의 눈동자에 백도운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가져오세요.” 한유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쉬세요.” 한유설은 빈말이라도 또 시킬 건 없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마치 맹수에 쫓기는 어린 양처럼 빠르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백도운은 냉랭한 시선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 금세 다시 자리를 고쳐앉으며 기획서를 훑었다. 한유설은 ‘드디어 퇴근이다!’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네 명의 남주들 중 백도운은 성연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자신의 꿈인 가수로서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힘든 일이 분명한데도 몇 년째 무리 없이 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백도운은 괴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유설은 만약 자신이 그와 같은 입장이었으면 진작에 심신이 망가져 자연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유설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1층으로 내려갈 때 백도운은 오은지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방금 방으로 간 도우미가 혹시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습니까?] 백도운은 피곤한 눈을 마사지하며 답장을 보냈다. [아니요.] 답을 보낸 후 그는 다시 일에 몰두하며 서류를 훑었다. 1층으로 내려온 한유설은 계단 끝에 서 있는 유다정과 정수연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정수연과 유다정은 사실 한유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순간부터 줄곧 계단 아래서 대기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들릴 백도운의 호통을 기대하며. 하지만 큰소리는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고 한유설이 1층으로 완전히 내려오고 난 뒤에도 잠잠했다. 두 사람은 유유히 멀어져가는 한유설의 뒷모습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언니, 유설 씨가 이번에는 아무 짓도 안 했나 본데요?” 만약 또 유혹 같은 걸 했으면 백도운의 성격상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유다정은 미간을 찌푸리다 정수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얼른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지난번 일도 오해였던 것 같네요. 하긴 유설 씨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죠.” “오해라뇨. 백도운 씨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그때 언니도 같이 봤잖아요. 두고 봐요. 얼마 안 가 금방 다시 본색을 드러낼 테니까.” 정수연은 아까까지만 해도 한유설에 관해 아무런 생각도 안 하다가 며칠 전 일을 떠올리며 또다시 씩씩댔다. 유다정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정수연을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한유설을 대신해 해명해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정수연과 한유설의 사이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그녀에게는 이득이었으니까. 유다정은 사실 한유설이 저택에 고용됐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 연예인 뺨치듯 예뻤을 뿐만이 아니라 풍만한 가슴과 탄탄한 엉덩이까지 몸매도 너무 환상적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무슨 수를 써서든 하루빨리 그녀를 저택에서 쫓아내 버리려고 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겠어.’ 방으로 돌아온 한유설은 미니 냉장고에서 시원한 체리를 꺼내고는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몸의 원래 주인인 악녀는 사교 활동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건지 업무용 카톡을 제외하고는 친구와 연락한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건 몸의 새로운 주인인 한유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는 고독을 즐기는 타입이라 휴식은 오로지 혼자서만 즐겼다. 잠시 후. 한유설은 슬슬 눈까풀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도 피곤했던 하루라 그런지 꿈도 안 꾸고 아주 푹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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