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송서아는 복부의 격렬한 통증을 참으며 허가윤의 병실을 나섰다.
문밖에는 조심스럽게 전복죽을 들고 있는 박유준과 뒤에서 허가윤이 먹고 싶다던 새콤한 살구를 들고 있는 민채원까지 진상들을 쌍으로 마주쳤다.
다만 박유준의 눈에는 오직 허가윤뿐이라 송서아를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를 문 쪽으로 거칠게 밀쳤다.
그러고는 허가윤에게 다가가 엄청 자상한 말투로 말했다.
“일단 이 전복죽 먼저 먹어요. 내가 다음 주에 비서 시켜서 베일리에 가 신선한 전복 사 오라고 할게요.”
좀 전까지 미쳐 발광하던 허가윤은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답했다.
“고마워요, 여보. 나한테 왜 점점 더 잘해주는 거예요? 이러다 나 버릇 잘못 들일라.”
박유준은 침대 맡에 앉아서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바보 같은 소리. 당신 지금 임신 중인데 당연히 잘해야죠 내가!”
한편 민채원은 송서아를 힐긋 곁눈질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서아 넌 그게 무슨 표정이니? 형님이 임신했는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마도 민채원은 일찌감치 송서아에게 불만을 품은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박유준과 송서아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고, 민채원도 그녀더러 백주현을 찾아가 검사를 받아보라고 수없이 말했으나 번마다 거부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민채원은 송서아가 둘만의 시간을 더 즐기고 싶어 박씨 일가의 대가 끊기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송서아는 이제 생리통으로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벽을 짚고 서 있었고 이마에서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옷을 다 적셨다.
하지만 민채원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그저 질투와 원망에 사로잡혀 아픈 척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얄미워 죽겠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남을 원망하고 질투한다는 말인가?
스스로 못 낳는 주제에 형님의 임신조차 막으려고?
송서아는 벽을 짚고 서서 박유준이 자신을 힐긋 쳐다보는 걸 정확하게 캐치했다.
이 인간은 분명 그녀가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줄곧 침묵을 택했다.
송서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민채원은 살구를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송서아가 원망과 질투 때문에 아픈 척한다고 단정 지은 듯했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쏘아붙였다.
“됐다, 됐어. 이만 가봐! 가윤이 기분만 상하게 하지 말고. 우리 집안은 이제부터 귀한 손주 녀석 지켜내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허가윤은 묵묵히 침대에 누워 송서아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 마치 ‘봐봐, 이 집안 모두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보살피고 있어. 아무도 네 생사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라고 말하는 듯했다.
송서아는 박씨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최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침실 발코니에 서 있었는데 발코니에는 그림 도구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송서아는 대학교 때 미술을 전공했고,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되었다. 가끔 흥이 나면 박유준이 발코니에서 그녀와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한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던 공간이 이제는 눈이 시릴 정도로 괴롭게 다가왔다.
그녀는 휴대폰을 귀에 바짝 대고 태연하게 말했다.
“엄마, 이번 주에 저 데리러 와주세요. 박유준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이 집안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최애라는 사실 진작 송서아를 집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박유준을 너무 그리워할까 봐, 박씨 저택에 남겨두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 싶었다.
이제 딸이 먼저 입을 열었으니 최애라는 기쁜 마음으로 답했다.
“그래, 당연히 집에 돌아와야지. 돌아오는 대로 박씨 일가와 모든 연을 끊고 새 출발 해.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다시 시작해야지. 엄마가 이번 주에 꼭 데리러 갈게!”
하지만 최애라의 목소리가 점차 우울해졌다.
“그런데 서아야... 박씨 일가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 아버지 사건 말이다. 아주 유능한 변호사를 알아봐 줬다네. 그 집안 사람들은 결코 유준이처럼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그러니 우리도 그런 호의는 받지 말자. 괜히 네가 나중에 그 집안 사람들 앞에서 기죽지 말고 상처도 받지 않도록 말이야.”
송서아는 발코니 난간에 손을 얹고 박씨 저택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엄마, 박유준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어요.”
최애라는 미처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딸은 박유준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이제 와서 그를 비난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전화기 너머의 의아한 말투에 송서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엄마. 그 집안에서 해주는 건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뭐. 그러니 그냥 편하게 받으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