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남하연은 한때 청담고에서 가장 부러움을 많이 받던 여자애였다.
단지 맑고 수수한 외모 때문도, 성적이 좋아서도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뒤에 언제나 황성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가자고 굳게 약속했다. 장난으로 미래에 낳을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두었을 만큼, 그들에게 ‘함께’가 아닌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찬란했던 세계는 단 하루 만에 무너져버렸다.
황성민의 아빠와 남하연의 엄마가 옷매무새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한 침대에 누워 있던 그날... 그 현장을 목격한 황성민의 엄마는 베란다 밖으로 몸을 던졌다.
붉은 피가 황성민의 깨끗한 교복 위로 점점이 튀었다.
하룻밤 사이 집안은 풍비박산 났고 두 사람의 관계 또한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황성민의 눈동자에는 남하연을 향한 뼛속 깊은 증오만 남았다.
그는 복수하듯 남하연을 밀어냈다. 둘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찢어버리고 소중히 쌓아온 약속들을 모조리 짓밟아 버린 뒤 차갑게 말했다.
“내 세상에서 영원히 꺼져 버려.”
남하연은 그가 바라는 대로 떠났다.
가장 완벽하고도 잔인한 방식으로 그의 세계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
그리고 십 년 뒤, 황성민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는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삶을 일궈냈고 곁에는 집안과 외모를 모두 갖춘 약혼녀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모교의 옛 교실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빛바랜 종이 위에는 잊으려 애썼던 남하연의 글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성민아, 난 목숨으로 죗값을 치렀어. 이제... 나를 용서해 줄래?]
...
청담 고등학교 3학년 체육 시간.
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운 체육 선생님이 체육부장에게 반을 맡기자마자 ‘사냥’이 시작됐다.
남하연을 괴롭히는 일을 놀이로 여기는 애들이 어김없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야, 남하연. 이리 와.”
체육부장이 바닥에 놓인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발끝으로 툭 가리키며 악의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거 메고 운동장 돌아. 종 칠 때까지 멈추지 마. 알겠어?”
남하연은 항의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묵묵히 걸어가 모래주머니를 등에 짊어졌다.
그날 이후 학교 전체는 약속이라도 한 듯 황성민의 분풀이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남하연은 그 모든 폭력을 조용히 감내했다. 마치 그게 자신이 치러야 할 죗값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교복을 흠뻑 적셨다.
젖은 잔머리가 창백한 얼굴에 엉망으로 들러붙고 가빠진 숨이 목구멍을 거칠게 긁었다. 폐는 찢어진 풀무처럼 비명을 질러댔고 혀끝에는 비릿한 쇠맛이 번졌다.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그때였다.
남하연의 시선이 무심코 운동장 가장자리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는 황성민이 있었다.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그는 여전히 곧게 뻗은 자세를 유지했다. 잘생긴 얼굴도 예전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에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 진서아가 안겨 있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속삭이자 무표정이던 황성민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황성민은 다정하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잎새 사이로 부서진 햇살이 두 사람 위로 흩뿌려지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연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 눈부신 장면이 남하연의 눈을 찌르듯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꽉 쥐어짜이는 듯한 감각에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성민 곁에서 온기와 애정을 독차지하던 사람은 분명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하연의 어깨 위에는 무거운 모래주머니 같은 죄책감과 지워지지 않는 낙인만 남아 있었다.
...
두 사람은 소꿉친구로 함께 자랐다.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별을 닮은 황성민은 청담고 모든 여학생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찬란한 빛이 머무는 곳은 오직 남하연 곁이였다.
그는 매일 아침 그녀를 위해 따뜻한 우유를 준비했고 시험 기간이면 밤을 새워 그녀의 노트를 대신 정리해 주었다.
생리통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쥔 날에는 서툰 손길로 조심스레 그녀의 아랫배를 문질러 주다가도 새빨개진 얼굴로 엄하게 타이르곤 했다.
“찬 거 먹지 말랬지. 또 이러면 진짜 가만 안 둬.”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가기로 굳게 약속했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의 이름까지 미리 지어두었다.
아이들 중 한 명은 황성민의 성을, 또 한 명은 남하연의 성을 따르기로 하자며 웃어넘겼다.
그들에게 ‘함께’가 아닌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황성민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소중히 감싸 쥐고 속삭였다.
“하연아, 내 모든 미래 계획에는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네가 있어.”
하지만 그 모든 꿈은 그 추악했던 오후, 산산조각 나버렸다.
황성민의 아빠와 남하연의 엄마가 불륜을 저질렀고 그 현장을 목격한 황성민의 엄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황성민의 아빠는 죄책감 한 점 없이 남하연의 엄마와 함께 야반도주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황성민에게 남은 건 증오뿐이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자연스럽게 남하연을 향했다.
지금 이 순간처럼... 황성민은 남하연이 한계에 다다라 비틀거리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면서도 입가에 냉소만 걸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곁에 있던 진서아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잔인하게 휘어진 그의 미소는 독 묻은 송곳처럼 남하연의 심장을 찔러 갈가리 찢어놓았다.
남하연은 그의 증오를 이해했고, 그가 겪고 있는 지옥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상이 무너졌다면 그녀의 세상 역시 무너진 것이었다.
남하연 또한 세상에 유일했던 가족인 엄마를 잃었다. 비록 방식은 달랐지만 두 사람의 뒤에는 이제 똑같이 텅 빈 폐허만 남았다.
...
남하연은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에 입술을 짓깨물며 피비린내를 삼켰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기계처럼 오직 앞만 보며 운동장 위를 계속 달렸다.
딩동딩동.
마침내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구원처럼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그제야 남하연은 온몸의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시야가 핑 돌았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끌어 농구대 아래 작은 그늘로 기어들어 갔다. 지금은 그저 타들어 가는 폐에 산소를 한 모금이라도 더 불어넣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진서아가 차가운 생수병을 든 채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하연아, 오래 뛰어서 덥지? 내가 시원하게 해줄게.”
진서아는 말이 끝나자마자 손목을 툭 기울였다.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생수 한 병이 남하연의 정수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아악!”
갑작스러운 냉기에 남하연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물이 눈가로 튀어 들어 따갑게 시렸고 젖어버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엉망으로 들러붙었다. 그 모습은 더없이 처참했다.
진서아는 천천히 몸을 숙여 남하연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속삭였다.
“어때? 많이 괴롭지? 네 엄마가 남의 남자를 꼬시는 천박한 불륜녀니까 이런 벌을 받는 거야. 네 엄마 때문에 성민이는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었잖아. 너희 엄마는 참 좋겠다. 남자랑 도망쳐 버리면 그만이니까. 넌 여기에 남겨두고 말이야. 그러니까 남하연, 넌 네 엄마 대신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해.”
남하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쏟아진 물줄기가 땀과 뒤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에게는 변명할 힘도, 맞설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하연은 이 모든 모욕을 묵묵히 견뎌내며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듯 일어섰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던 거대한 농구대가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더니 굉음을 내며 쓰러지려 했다.
거의 동시에 옆에 서 있던 황성민이 달려들었다.
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는 난생처음 보는 당황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진서아를 향해 몸을 던졌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몇 미터 밖 안전한 곳까지 굴러갔다.
그 순간 거대한 농구대가 지면을 향해 낙하했다.
쿠웅!!!
무자비한 금속 프레임이 남하연의 몸 위로 덮쳐 내려앉자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끔찍한 통증이 남하연의 신경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흐릿한 시야 너머로 안전한 곳에서 진서아를 꽉 끌어안고 있는 황성민을 똑똑히 담아냈다.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괜찮냐고 묻지도, 한마디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남하연의 비참한 몰골을 차갑게 내려다본 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리고 진서아의 손을 잡은 채 교실로 향했다.
남하연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복판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성민아... 정말 단 한마디도 안 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져 있는데도...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우리는 정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거야?’
의식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남하연의 머릿속엔 그날의 잔상이 마지막 불꽃처럼 치솟았다.
황성민은 차갑게 식어버린 엄마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남하연을 노려봤다.
“남하연. 우리는... 절대 돌아갈 수 없어.”
...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찌르는 짙은 소독약 냄새였다.
“깼어요?”
차트를 넘기며 무심하게 묻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으면 다행이네요. 어서 보호자분께 연락해서 병원으로 오시라고 하세요.”
남하연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낯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어떻게 된 건가요?”
그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병실로 들어섰다.
“남하연 학생, 방금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위암 말기입니다. 전이도 많이 진행됐고요. 지금 바로 보호자분께 연락하세요. 치료 방향도... 더 늦기 전에 결정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