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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신지은은 앞길이 창창하던 거문고 연주자였다. 스물세 살에 이미 콘서트홀에서 독주회를 열 정도의 재능과 명성을 갖췄지만 한 번의 사고로 그녀는 양쪽 귀의 청력을 모두 잃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무너졌다. 커리어는 한순간에 추락했고 주변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멀어졌다. 심지어 가족들마저 한 달 치 치료비를 내준 뒤, 더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런 신지은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단 한 명, 연인이던 강재민뿐이었다. 강재민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가족과의 연을 끊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상속받을 수 있었던 수백억의 재산도 스스로 포기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고작 서른 평 남짓한 임대아파트로 들어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달, 신지은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모든 걸 끝내려 했다. 하지만 강재민이 그녀를 붙잡아 끌어내렸고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말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두 번째 달, 신지은은 한밤중에 수면제 한 통을 전부 삼켰다. 그러나 강재민이 곧바로 이를 알아차리고 병원으로 데려가 위세척을 했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얼마 후, 강재민은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신지은에게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그는 손짓 하나, 표정 하나로 그녀에게 다시 말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전했다. 그렇게 조금씩 신지은은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은 사람처럼 재활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강재민은 한 디자인 회사에 취직해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가장 기초적인 도면을 그리는 신입 사원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가 첫 프로젝트 보너스를 받은 날, 강재민은 신지은을 데리고 시내에서 가장 큰 보청기 매장으로 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교차로에서 신호를 무시한 채 통제 불능 상태로 달려든 승용차가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강재민은 온 힘을 다해 신지은을 밀쳐냈다. 그 바람에 신지은은 가로수 화단 쪽으로 넘어지며 뒤통수가 돌에 세게 부딪혔고 손에서 놓친 보청기 상자는 빗물 위를 굴러갔다. 의식을 잃기 직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강재민과 산산이 부서진 보청기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병원 천장이었다. 신지은은 몸을 일으키려다 강한 현기증에 토할 뻔했지만 이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귓가에 울리는 의료기기의 규칙적인 소리, 복도를 지나는 간호사 카트의 바퀴 소리,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안내 방송... 반년 넘게 사라졌던 소리들이 한꺼번에 신지은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손을 들어 귀 옆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소리는 너무도 선명했다. 그때,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식 돌아오셨어요? 남자 친구분은 지금 응급 수술 중이에요. 그래서 보호자 서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순간, 신지은의 얼굴에 번지던 기쁨은 바로 사라졌고 심장이 마치 거대한 손에 움켜쥐어진 것처럼 조여 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응급실로 달려가 손이 떨려 펜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서명했다. 곧, 의사가 다가와 다급하게 말했다. “내부 장기 손상, 과다 출혈이라 환자에게 O형 혈액이 급히 필요합니다.” 의사의 말에 신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매를 걷었다. “제가 O형이에요.” 수술에 필요한 400mL 혈액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동안, 그녀는 수술실 앞의 ‘수술 중’ 표시등을 바라보며 끝없이 기도했다. 그 뒤로 무려 72시간 동안 신지은은 수술실 앞에 있는 벽에 기대 잠깐씩 눈을 붙였고 깰 때마다 가장 먼저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흘째 새벽, 의사가 다가와 말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신지은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살아 있기만 하면 돼. 깨어 있으면 됐어.’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재민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의 귀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고. 다시 거문고를 칠 수 있고, 일터로 돌아갈 수 있고, 그 좁은 임대아파트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이내 신지은은 벽을 짚고 일어나 화장실에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의 그녀는 수척했지만 눈빛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신지은은 환자복을 깔끔하게 고쳐 입은 뒤, 강재민의 병실로 향했다. 하지만 문손잡이에 손을 대려는 순간, 안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민아, 나 정말 놀랐어. 그때 네가 다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지은 씨 연습실에 폭죽을 던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신지은은 그대로 멈춰 섰다. 문 옆 유리창 너머로 보인 사람은 안이서였다. 강재민의 소꿉친구이자 지금 가장 주목받는 젊은 음악가. 안이서는 병상에 앉아 강재민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러자 강재민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안이서는 눈가가 빨개진 채 고개를 들었다. “지은 씨가 청각을 잃고 대회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선발전 우승은 내 차지가 아니었을 거야. 네가 이 비밀을 대신 숨겨 줬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잖아. 그런데 넌 반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청각장애인을 곁에서 돌봤으니...” 그녀의 말에 강재민은 잠시 침묵한 뒤,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말했잖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언제나 너라고. 너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가치 있어.” 신지은은 청력을 되찾은 뒤 처음으로 들은 진실이 연인의 배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대화에 그녀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폭발음 뒤에 찾아온 끔찍한 침묵, 현을 끊어도 들리지 않던 절망, 부모와 친구들의 회피하는 시선, 몇 번이나 삶을 끝내려 했던 절망적인 순간들. 그런데 200일 동안의 고통은 결국 안이서를 위한 자리를 비워 주는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강재민이 해 온 모든 일 또한, 그녀라는 ‘짐’이 조용한 무음의 세계에 얌전히 머물게 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지금까지 신지은을 옆에서 지켜주고 다독여준 이유가 사랑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으로 짜인 연극이었다. 신지은은 얼굴에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들었고 이내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병원을 나와 전에 함께 일했던 하모니아로 향했다. 그곳의 책임자, 조수희는 그녀를 보자 무심코 인사를 건넸다가 손짓이라도 해야 하나 망설이던 순간 신지은의 목소리를 듣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지은 씨, 이제는... 들리세요?” 신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음 달 해외 순회공연, 거문고 연주자 자리는 아직 비어 있죠?] 조수희가 망설이자 신지은은 단호하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열흘 뒤에 오디션 한번 봅시다. 예전 수준에 못 미치면 제가 스스로 물러날게요.] 조수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지금 당장 계약서 준비할게요.” 잠시 후, 그녀는 서류를 찾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재민 씨도 회복 소식 들으면 정말 기뻐하겠어요. 며칠 전에 청각장애인에게 맞는 일자리가 있는지 여기까지 알아보러 오셨거든요.” 신지은은 거문고 위에 놓인 악보를 넘기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누구 눈에나 강재민은 완벽한 남편이었을 것이다. 진단 결과가 나온 그날 바로 혼인신고를 했고 외출할 때마다 휴가를 내어 동행했다. 자신은 김치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신지은의 비싼 재활 치료비는 끊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친절에는 보이지 않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강재민은 당시 사고 이야기가 나오면 늘 화제를 돌렸고 연습실의 CCTV 영상도 우연히 사라졌다고 둘러댔다. 신지은은 더 말하지 않고 계약서를 받아 조용히 서명했다. 그리고 문득 두 달 동안 모아 두었던 강재민의 생일 선물 자금이 떠올랐다. 마침 그 돈이면 순회공연 첫 도시로 가는 편도 항공권 한 장은 충분히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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