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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택시를 불렀다가 변태 살인마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밤 인천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소은지는 택시 잡는 데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이때, 기적처럼 태워 주겠다는 운전자를 만나 그의 차량에 탑승했다. 하지만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오뚝한 콧날과 하얀 피부는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매고 있어 겉보기엔 지극히 점잖았다. 그러나 소은지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위아래로 꿀렁이는 목젖과 고요한 차 안에 간간이 울려 퍼지는 미세한 침 삼키는 소리. 그 느낌은 마치 오래도록 완벽하게 위장해 온 맹수가 마침내 찾아낸 먹잇감을 앞에 두고 극도로 흥분한 동시에, 지금 당장 달려들어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과도 같았다. 소은지는 뉴스에서 그런 장면을 수도 없이 봤다. 변태 살인마들이 먼저 여자를 차에 태운 뒤, 외진 곳으로 끌고 가 범행을 저지르는 레퍼토리. 괜스레 생각할수록 겁이 나서 목소리마저 떨렸다. “저, 저기요... 혹시 앞쪽 길가에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순간, 운전석의 남자는 이를 꽉 악물었다. 설마 들킨 건가? 이내 한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럽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안 받을 테니까.” 걱정 말라니?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는가. 노바 클럽에 가려던 이유는 사실 택배기사인 남자친구가 오늘 밤 동창들과 모임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수시로 연락하기로 약속했건만 무려 1시간째 통화되지 않았고 문자도 답이 없었다. 박현우와 만난 3년 동안, 그는 늦어도 10분이면 꼭 답장을 보냈고 전화는 항상 바로 받았다. 갑작스러운 연락 두절에 그녀는 온갖 끔찍한 상상을 다 했고,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소은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 비도 그친 것 같고... 여기서 지하철역도 가까워서 뛰어가면 되니까... 굳이 귀찮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괜히 남자의 화를 돋운 건 아닐지 싶어 손가락을 덜덜 떨며 112를 누르려던 찰나, 갑자기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았어요.” 낮고 차분한 음성이 귀에 들어오자 소은지는 흠칫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는 이미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길가에 멈추었다.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내 문을 벌컥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지하철역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마치 등 뒤에서 맹수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 안의 남자는 앞 유리 너머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그때, 갑작스럽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더니 침착하고 공손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대표님, 오늘이 치료받는 날인데 실장님이 말씀하시길 인천에 가셨다고... 혹시 소은지 씨 만나러 가신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상태로는 소은지 씨와 접촉하시는 건 무리예요.” 개인 주치의이자 심리상담사인 정민기의 말에 한태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에 10년 전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창업 초기 인천에 시장 조사하러 왔다가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 나는 바람에 폐소공포증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거의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부드러운 작은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커다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오빠, 많이 무서워요? 괜찮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소녀의 앳된 목소리와 달콤한 미소는 그의 주위를 뒤덮고 있던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덕분에 폐소공포증은 극복했지만, 대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다른 병에 걸리고 말았다. 소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욕망을 참을 수 없었고, 오랜 심리치료를 통해서야 겨우 그 충동을 억눌렀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그녀를 만나러 온 것도 이제는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실제로 차에 앉는 순간, 수년간 쌓아온 방어막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머릿속은 온통 그녀를 서울로 납치해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태현은 검은 속내를 감춘 채 휴대폰에 대고 명령했다. “인천으로 와서 내 연애 코치가 되어줘.” 이번 만남으로 그녀가 겁먹고 도망쳤으니 반드시 만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휴대폰 너머로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사해보니까 소은지 씨는 현재 남자친구가 있다고 나오는데, 이렇게 대놓고 끼어드는 건 도덕적으로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도덕이라...” 한태현의 말투에 살기가 어렸다. 곧이어 정적이 이어졌고, 정민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제가 괜한 걱정한 것 같네요.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한편, 소은지는 지하철역으로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객차 안으로 뛰어들어서야 자리에 앉아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너무 위험했어. 앞으로는 절대 낯선 사람 차 함부로 타면 안 되겠네...” 30분 후, 그녀는 박현우가 있는 클럽 룸 입구에 도착했다. 문밖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방문 목적을 전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훤칠한 인영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박현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긴 왜 왔어?” 소은지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울먹거렸다. “문자를 백 통 넘게 보냈는데도 답장을 안 했잖아요. 현우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예전 같으면 그는 자신을 꼭 끌어안으며 달래주기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박현우는 그녀를 살짝 밀치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 동창들이랑 모임 있다고 했잖아. 친구들 앞에서 망신 주려고 작정한 거야?” “네?” 소은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3년 전 눈 내리던 밤, 박현우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이후로 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며 많이 의지해 왔다. 따라서 저도 모르게 집착하게 되었고, 한 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마치 수천 마리 개미에게 물린 것처럼 괴로웠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소은지는 불편한 마음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라도 안부 메시지 보내달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박현우는 손을 휘휘 저으며 한 마디만 남기고 다시 룸으로 들어갔다. “조심히 가.” 훤칠한 뒷모습에서 이유 모를 차가운 기운이 스며 나왔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콕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피곤해서 갑자기 차갑게 구는 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쓸쓸히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룸 문틈 사이로 구경하던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왔다. 누군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나연 씨랑 곧 결혼할 텐데, 가난한 택배기사 코스플레이 연애 게임은 대체 언제 끝난대?” 박현우는 태연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조금 전에 빼놓은 롤렉스 시계를 다시 차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팔을 뻗어 한가운데 앉아 있는 주나연을 품에 안았다. 다정한 목소리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언제 끝날지는 내 아내한테 달렸지.” 룸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우진 그룹 후계자 박현우와 주씨 가문 외동딸 주나연이 이미 약혼한 상태라는 걸. 또한, 그녀의 부탁이라면 박현우는 무조건 응했다. 이 연애 게임을 시작하게 만든 사람도 다름 아닌 주나연이었다. 주나연이 피식 웃었다. “아직 아니야. 원래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지면 더 아픈 법이지.” 다들 소은지가 어쩌다 주씨 가문의 눈 밖에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주나연이 자신의 약혼자를 3년 동안이나 서민 출신 여자와 사귀게 놔둘 정도라니.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껏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 한편, 집으로 돌아온 소은지는 방금 박현우가 보였던 쌀쌀맞은 태도 때문에 괜스레 불안했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워서도 이리저리 뒤척이며 최근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혹시라도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닌지 곱씹어 보았다. 답을 찾고자 각종 사이트에서 검색까지 했다. 그러다 화면에 나타난 한 문구를 보았다. [3년 법칙이란, 남녀가 사귄 지 3년이 지나도 결혼하지 않으면 대부분 헤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보는 순간 소은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현우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 울다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뭐라고? 그 택배기사한테 청혼하겠다고?” 절친 한유정이 그녀의 말을 듣고 휴대폰 너머로 급하게 충고했다. “은지야, 네가 주씨 가문에서 쫓겨난 뒤 줄곧 가족을 갖고 싶어 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결혼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그 택배기사, 과연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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