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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었다. 양혜린은 욕실 문 앞에 서서 안을 향해 말했다. “주태준, 당신이 귀찮아서 사인 안 하는 거라면 내가 대신 도장 찍어버릴게.” 안에 있던 주태준은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양혜린이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듯 건성으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내 인장은 서재에 있으니까 가져가서 찍든 말든 놀아. 찍고 나면 당신 화도 풀릴 테니 내려와서 나랑 같이 야식이나 먹어줘.” 양혜린은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서재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익숙한 손길로 서랍 속에 있는 그의 인장을 찾아 인주를 묻힌 뒤 이혼 합의서 위에 힘주어 ‘주태준'이라는 이름을 꾸욱 찍었다. 붉은 인장이 마침표처럼 서류 위에 찍혔다. 양혜린은 핸드폰을 꺼내 도장이 찍힌 이혼 합의서를 촬영해 변호사에게 보냈고 곧바로 거액의 수임료를 송금했다. [변호사님, 가능한 가장 빠르게 이혼 소송 진행해 주세요. 최단기간 내에 그 사람과 이혼하고 싶어요.] 이정후 변호사는 곧 답장을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양혜린은 그 호칭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옆으로 던진 채 혼자 침대에 누워 먼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양혜린이 눈을 떴을 때 주태준은 이미 말끔한 옷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그녀를 본 주태준은 무심하게 말했다. “일어났어? 오늘 가족 모임이 있으니까 당신도 준비해. 이따가 같이 가자.” 주씨 가문은 재벌가라 규칙이 많았고 가족 모임은 특히 더 까다로웠다. 양혜린은 그곳에 갈 때마다 본성을 꾹꾹 눌러 담고 온순하고 얌전한 손주며느리이자, 며느리 역할을 연기해 왔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까다로운 규칙도 참고 견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 가.” 양혜린은 단호하게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채 대답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였지만 유난히 단호하게 들렸다. 주태준은 넥타이를 매던 손을 잠시 멈추고 거울 너머로 그녀를 한 번 힐끗 보았다. 어제 일로 아직도 삐졌다고 여긴 그는 별생각 없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래. 그럼 집에서 쉬어.” 말을 마친 그는 슈트를 정리하고는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혜린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차미정에게서 온 전화였다.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자마자 차미정의 욕설이 쏟아졌다. “양혜린! 너 지금 이제 무슨 짓이야?! 평소에 태준이가 밖에서 노는 거야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이번엔 교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자를 집안 어른들 모인 자리에 데려오게 놔뒀어? 그 강가영이라는 애, 방금 가족 모임에서 사소한 일로 태준이 사촌 동생이랑 다퉜어. 태준이가 말도 없이 그 애 편을 들어주고 사촌 동생 뺨을 때리고 나가버렸다고! 어른들 다 보는 앞에서! 너, 지금 당장 본가로 기어들어 와!” 차미정은 극심한 ‘아들 바라기'였다. 주태준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차미정은 그저 아내인 양혜린이 남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만 하며 탓했다. 양혜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결국 옷을 갈아입고 차를 몰아 주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공기는 숨 막히게 무거웠다. 차미정은 상석에 앉아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 있었고 그 옆에는 표정이 험악한 집안 어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장 꿇어!” 차미정은 그녀를 보자마자 바닥에 놓인 뾰족한 못이 촘촘하게 박힌 나무 빨래판을 가리켰다. 그건 주씨 가문에서 흔히 쓰는 체벌 도구 중 하나였다. 양혜린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머님, 이 일은 저와 상관없어요...” 그녀는 설명하려고 했다. “뭐?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니?!” 차미정이 고함을 쳤다. “다 네가 쓸모없어서 남자 마음 하나 못 잡으니까 저런 애가 굴러들어 오는 거 아니야?! 얼른 잡아 눌러서 꿇려!” 그녀의 말에 두 명의 도우미가 다가와 양혜린을 억지로 눌러 뾰족한 못 위에 무릎을 꿇게 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무릎에서 치솟았고 양혜린은 신음을 삼켰다.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혔다. “태준이한테 당장 전화해서 기어들어 오라고 해! 그놈이 돌아와야 네가 거기서 일어날 수 있어!” 차미정은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양혜린은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주태준의 번호를 반복해서 눌렀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들려오는 건 늘 똑같은 기계음뿐이었다. 무릎 아래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피가 번져 연한 색의 치맛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주변에 있는 집안 어른들은 냉담하거나 고소하다는 얼굴로 바라볼 뿐 아무도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열 번이 넘게 걸었을 때 즈음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주태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콧소리가 섞인 기세등등한 웃음을 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강가영이었다. “어머, 태준 씨 와이프시죠?” 강가영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살짝 쉬어버린 듯했다. “정말 죄송해서 어쩌죠? 태준 씨가 지금은... 제 품에 있어서 나올 수가 없어서요. 전화를 받을 수가 없네요.” 그 말을 끝으로 양혜린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 뚜... 통화 종료음이 울릴 때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양혜린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옆에 있던 차미정은 통화 내용을 어렴풋이 듣고는 분노로 온몸을 떨며 양혜린에게 화풀이했다. “이 쓸모없는 것! 남자 마음 하나도 못 붙잡아서 밖에 나도는 년한테 태준이 몸까지 빼앗겨?! 계속 거기서 꿇고 있어! 네 남편이 언제쯤 너를 불쌍하게 여겨서 지켜주러 오면 그때 일어나!” ‘하, 주태준이 날 지켜주러 온다고?' 양혜린은 차가운 못판 위에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릎은 이미 감각이 무뎌질 만큼 아팠고 마음은 그보다 더 차가워졌다. 예전에는 그녀가 차미정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주태준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그녀의 전화만 받으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녀를 등 뒤로 감쌌다. 그러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제 사람은 제가 알아서 해요. 그러니까 제 아내한테 신경 쓰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른 여자 품속에 빠져 있었고 그녀의 전화조차 받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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