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권예진은 벌써 잠기운이 싹 사라졌다.
어제 점심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배가 고파 주방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7시, 공호열이 2층에서 내려왔다. 깨끗한 흰 셔츠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어 더욱 훤칠해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권예진을 보자마자 공호열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
‘허. 이제 와서 현모양처 코스프레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임길태가 다가와 말했다.
“도련님, 아침 식사 다 준비되었어요. 모두 예진 씨가 직접 만든 거예요.”
권예진은 옆에 서서 긴장한 얼굴로 공호열의 표정을 살폈다.
공호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침묵할수록 권예진은 더욱 불안했다.
주방으로 들어간 공호열이 임길태와 도우미들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여기 있을 필요 없으니까 다 나가요.”
“네.”
임길태는 바로 도우미들과 함께 주방을 나갔다.
커다란 주방에 권예진과 공호열 단둘만 남았고 침묵과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는 불안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다.
“몇 시에 들어왔어?”
그의 목소리가 주방의 침묵을 깨뜨렸고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오아시스가 세계 최고의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감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새벽 4시요.”
그러고는 서둘러 해명했다.
“일부러 늦게 들어온 건 아니에요.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한 나머지 깜빡 잠이 들어...”
공호열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가득 서리더니 갑자기 두 글자를 내뱉었다.
“벗어.”
“네?”
권예진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무표정이라 기분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몸 검사해봐야지.”
공호열은 그녀를 무섭게 내려다보았다.
“스캔들이 터진 상황에 다른 남자 집에서 밤까지 보냈으니 결과가 어떨지 잘 알 거 아니야. 스스로 벗을래,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
‘몸을 검사한다고?’
권예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그 어떤 선택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식탁 의자가 쾅 하고 넘어진 바람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권예진이 급히 해명했다.
“우현이랑은 그런 관계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고 오늘 우연히 만나서 밥 먹고 얘기 좀 나눴을 뿐이에요.”
“할 말이 얼마나 많길래 그 남자 집에서 밤까지 새워야 다 할 수 있는 거지?”
공호열이 코웃음을 쳤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나오네.’
인내심을 잃은 그는 후자를 택한 듯 권예진에게 다가갔다.
권예진은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식탁에 부딪혔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정말이에요. 호열 씨를 속이려고 이런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게 말이 돼요?”
억울하고 두려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혼을 강요하고 남을 모함한 적도 있는 네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공호열은 그녀를 그의 몸과 식탁 사이에 가두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살짝 잡고는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어디 있어?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몸을 검사하겠다는데 뭘 그렇게 두려워해?”
그의 무서운 기운이 그녀를 덮쳤다.
권예진은 갑자기 귀가 윙윙거렸고 보이지 않는 큰 손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졌으며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전에 유포리아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그땐 김다윤을 완전히 믿었다.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그녀는...
마음속에 말 못 할 슬픔이 밀려왔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했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모욕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임 집사, 호열이 집에 있어?”
바로 그때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는데 말투가 조금 쌀쌀맞았다.
권예진은 순간 마음이 움찔했고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래 시어머니 연정란이었다. 스캔들 기사를 보고 따지러 온 게 분명했다.
“어떻게 처리할지 잘 생각해봐.”
공호열은 그녀를 꿰뚫어 보듯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우리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
연정란은 원래 연예계의 가십거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늘 공지율이 할아버지를 보러 공씨 저택으로 왔다가 우연히 좋아하는 연예인의 스캔들 얘기를 꺼내면서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스캔들이 터져서 너무 속상해요.”
온혜영이 물었다.
“대체 어떤 남자길래 우리 지율이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엄마한테 보여줘 봐.”
공지율이 휴대폰을 건네자 온혜영은 장영희와 연정란과 함께 보았다.
“형님, 동서, 같이 봐요. 조언도 좀 해주고.”
기사 사진을 힐끗 보던 장영희의 두 눈이 흔들리더니 일부러 추측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 여자... 왠지 낯이 익은데?”
“정말요? 어디 한번 봐요.”
온혜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진을 뚫어지게 보던 그때 엄청난 비밀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이 옷차림... 권예진 씨 아니에요?”
장영희가 말했다.
“맞아. 어제 본가에 왔을 때 입었던 옷이랑 똑같아.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연정란의 안색을 살피던 온혜영은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동서, 신경 좀 써야겠는데? 보아하니 호열이가 골칫덩이를 데려온 것 같아. 호열이한테 결혼을 강요하면서 한편으로 남자 연예인이랑 스캔들이 터지다니. 우리 공씨 가문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야.”
만약 공지율이 공씨 저택에 오지 않았더라면 권예진과 정우현이 스캔들이 터졌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거실.
연정란은 공지율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여의사와 간호사가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권예진에게 물었다.
“스캔들 기사에 나온 여자가 혹시 너야?”
“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권예진은 마치 심문을 받는 범죄자 같았다.
공호열은 옆에 놓인 1인용 가죽 의자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아무리 네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호열이와 공씨 가문의 체면은 생각해야지.”
그러고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아들을 힐끗 보았다.
“호열아, 넌 스캔들에 대해 알고 있었어?”
“네.”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단 말이야? 멋대로 하게?”
화가 난 연정란은 얼굴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 마음속에 권예진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
늘 만인이 우러러보는 아들이 촌뜨기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게 너무도 분했다.
그때 공지율이 입을 열었다.
“오빠, 정말 이런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공호열은 고개를 살짝 들어 공지율을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인데?”
공지율이 대답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딴 남자를 만나고 오빠의 돈과 권력, 그리고 공씨 가문 안주인 자리를 탐내는 여자잖아요. 이런 여자랑 결혼했다간 오빠 언젠가는 차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