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임길태는 옆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권예진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곁눈질로 공호열을 힐끗거렸는데 잘생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 날, 본가에 가야 했기에 권예진은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화장한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래층 거실로 내려가니 청소하는 도우미들만 보일 뿐 공호열은 보이지 않았다.
“집사님, 호열 씨는요?”
권예진이 집사에게 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예진 씨. 도련님 아직 안 내려오셨어요.”
집사는 예쁜 디저트를 담은 그릇을 들고 있었다.
“도우미한테 디저트 좀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와서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고맙습니다, 집사님.”
30분 후 권예진은 디저트를 다 먹었다. 도우미들도 청소를 마치고 모두 떠났지만 공호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권예진의 옷차림을 본 임길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진 씨, 이 옷차림으로 본가에 가실 건가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 옷은 김씨 가문으로 돌아가던 날에 사부님께서 특별히 산에서 내려오셔서 사다 주신 건데 브랜드 제품은 아니지만 품질과 디자인이 괜찮아요.”
권예진이 말했다.
“그 꼴을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여자 하나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
권예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공호열이 계단에 서 있었다. 눈빛이 차가웠고 몸에 걸친 검은색 수제 양복이 늘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의 눈빛에 서린 불쾌함과 싸늘함에 권예진은 입가에 맴돌던 말을 다시 삼켰다.
시간을 확인한 임길태가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도련님, 아침 식사 다 준비했어요.”
“아침은 됐어요. 속이 메슥거려서.”
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뒷모습이 냉정하면서도 늠름했다.
권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고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 검은색 벤틀리가 번화한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차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권예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공호열이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서류를 뚫어지게 보면서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옆모습마저 잘생겼고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권예진은 그를 잠깐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뵈러 가는데 빈손으로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뭐라도 사갈까요?”
그러자 공호열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조차 들지 않고 말했다.
“결혼을 강요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현모양처인 척해?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약 10분 후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권예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예요? 시간도 늦었는데 본가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집 사람들이 날 싫어해서 늦게 갔다간 괜히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어.’
공호열은 대답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내려.”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공호열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공호열이 카드 지갑에서 블랙카드 한 장을 꺼내 권예진에게 건네더니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난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민욱이랑 같이 가서 옷이나 사.”
권예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나도 돈 있어요.”
“근데 그런 옷 입고 다녀?”
공호열이 대놓고 비웃었다.
뭐라 하려다가 또 무슨 모욕적인 말을 쏟아낼지 몰라 권예진은 재빨리 웃으면서 블랙카드를 받았다.
“고마워요, 호열 씨.”
받는 것과 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권예진은 블랙카드를 들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여성 의류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 간판에 새겨진 로고를 본 공호열이 차갑게 웃었다.
‘탐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기까지 하네.’
...
권예진은 쇼핑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과거 성운산의 도교 사원에서 살 때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산에서 내려와 사곤 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잽싸게 옷 두 벌을 골랐다.
옆에 있던 정민욱은 시종일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브랜드 여성 의류는 백화점에서 가장 비싼 브랜드였다. 역시 허영심만 가득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옷은 XS 사이즈로 주시고 부츠는 235mm로 주세요.”
권예진이 점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런데 그녀가 건네는 카드를 본 정민욱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점원에게 건넨 게 공호열이 준 블랙카드가 아닌 평범한 신용카드였다.
‘내가 이 여자를 과소평가했구나. 연기하는 와중에도 완벽을 추구하려고 신용카드를 긁어 대표님의 환심을 사려 하다니.’
그 생각에 정민욱의 얼굴에 경멸스러운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권예진은 계산을 마치고 곧장 탈의실로 가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탈의실에서 나온 권예진을 본 정민욱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다가가 말했다.
“예진 씨, 앞쪽에도 여성 의류 매장이 있고 보석 매장은 2층에 있어요.”
“됐어요.”
권예진은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갈아입은 옷 포장해주세요.”
그녀는 명품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꾸미는 법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공호열은 지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속물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차려입어야 하는 자리에 갈 일이 많지 않으니 두 벌이면 충분했다.
권예진은 찻잎을 두 통 산 다음에 주차장으로 향했다.
멀리서 차에 기대선 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공호열을 보았다. 눈웃음을 짓고 있었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곁눈질로 권예진을 본 공호열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어깨에 흩어진 검은 긴 머리는 마치 고급 비단 같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청초하고 단아했다.
베이지색 원피스에 같은 색 계열의 카디건을 매치했고 발목까지 오는 스웨이드 부츠를 신었다. 참으로 조신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깊은 산에서 자란 촌뜨기가 아니라 오히려 세련된 재벌 집 딸처럼 보였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품위 있고 당당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권예진이 어떤 사람인지 떠올린 순간 공호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차에 탄 후 블랙카드를 공호열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공호열은 받지 않고 되레 비웃었다.
“가지고 있어. 네가 촌스럽게 입고 다니면 내가 여자 하나 먹여 살릴 능력도 없는 놈처럼 보일 거라고.”
20분 후 검은색 벤틀리가 공씨 저택에 들어섰다.
공호열은 권예진이 들고 있는 찻잎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어머, 우리 가문의 큰 공신 오셨네. 이 시간에 오다니 역시 사모님의 팔자는 다르다니까.”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실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큰어머니셔.”
공호열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는데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권예진은 웃으면서 인사했다.
“둘째 큰어머니, 안녕하세요.”
“안녕은 무슨.”
온혜영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렸어. 내가 뭐랬어? 시골에서 온 사람은 안 된다니까. 예의범절을 모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기본적인 시간 개념조차 없어? 온 가족이 예진 씨 하나 기다리면 아주 대단한 성취감이라도 느끼나 보지? 그리고 혼인신고 한 후에 큰어머니라고 불러.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겠어.”
공씨 가문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권예진은 대충 알고 있었다.
대대로 부유했고 공호열의 가족들 모두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온혜영은 장옥영과 친한 사이였기에 그녀를 더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권예진이 들고 있는 찻잎을 본 온혜영이 피식 웃었다.
“고작 찻잎 두 통 들고 왔어? 우릴 거지 취급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