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그 남자
“너 남자랑 자본 적 있어?”
늦은 밤, 출장 가서 술까지 한잔 걸친 하윤슬은 자려고 누웠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절친 강주하의 말이 마치 360도 입체 사운드처럼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젊을 때 얼른 잘생긴 남자 하나 꼬셔서 한 번 해봐. 그건 창피한 게 아니야.”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호텔 침대에 쓰러진 하윤슬의 얼굴은 술기운이 올라 홍조를 띠었고, 물미역처럼 풍성한 긴 머리카락은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다.
한 달만 지나면 스물여섯, 이미 어엿한 성인이지만 지금까지 남자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첫 키스는 물론 그런 일은 꿈도 못 꾸었다.
사실 강주하도 그녀에게 여러 번 얘기했었다. 심지어 야한 농담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 말이 꼭꼭 눌러두었던 욕망을 건드린 듯했다.
술기운까지 더해지자 온몸이 달아올라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하윤슬은 몸을 뒤척였다. 뭔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느낌에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옆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렌즈도 빼고 술도 마신 상태라 화면이 흐릿하게 보였고, 연락처 이름 중에 ‘강’씨로 시작하는 사람을 보고 대화창을 눌렀다.
[몇 개만 보내줘 봐봐.]
상대방은 금방 답장을 보냈다.
[?]
하윤슬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술기운을 빌려 수위 높은 농담을 서슴없이 던졌다.
[시치미 떼지 마. 남자랑 그거 사이에서 하나 골라서 보내. 나 1501호야.]
그리고 새빨간 입술 이모티콘도 덧붙였다.
문자를 보내고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없자 물이라도 마시려고 몸을 일으킨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설마 진짜 이 밤중에 남자를 보낼 리 있겠는가.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강... 대표님?”
막 샤워를 마친 듯 남자의 짧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몸에는 진한 색상의 실크 가운을 걸쳤고, 느슨하게 묶은 끈 사이로 움푹 팬 쇄골에 새겨진 검은 숫자들이 선명히 드러났다.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선명한 복근이 치골 라인까지 매끈하게 이어졌다.
키가 워낙 크고 덩치까지 있어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졌고, 늘 차갑고 무심하던 눈빛은 오늘따라 어딘가 달라 보였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는 듯했다.
“무슨 일...”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곧이어 입술이 맞닿으면서 정적이 찾아왔다.
남자의 입 안에서 퍼지는 술 냄새는 자신이 마신 것과는 전혀 다른 향이었다.
세상이 빙글 돌더니 하윤슬은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하얀 슬립 원피스 위로 언뜻 보이는 진한 색상의 실크 가운은 시각적으로 무한의 상상을 자극했고, 분위기가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강태훈은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아니면 한 회사의 대표가 한낱 주임의 방까지 찾아올 리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몸부림치다가 하윤슬은 우뚝 멈췄다. 생각해보면 첫 경험을 이렇게 잘생기고 돈 많고 권력 있는 남자에게 준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가 누구였는지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까.
사실 두 사람은 중학교 동창이며, 거의 1년 가까이 짝꿍이었지만 강태훈은 새까맣게 잊었다.
그저 하룻밤의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 직속 상사조차 회사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람인데 하물며 일개 직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음 날 강태훈과 잤다고 스스로 떠들고 다녀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잠깐의 고민 끝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맞으며 그녀는 용기를 내어 손을 들어 남자의 목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