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이혜정은 이겼다는 얼굴로 이하음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하음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게 밟아버리고 싶었다.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누군지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한편 진태하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이하음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이하음은 거의 목석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엄마의 도움을 받고도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할아버지의 관심을 얻었는데도, 진태하라는 강력한 파트너를 얻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이혜정에게 맞서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최씨 가문의 압박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한영애의 친정도 최씨 가문 앞에서는 그저 소가문에 불과했다.
이하음의 발걸음이 천천히 이혜정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에 무거운 족쇄라도 채워놓은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진태하의 얼굴에 감돌고 있는 실망이라는 감정을 본 이하음은 마음이 씁쓸했다.
결혼하겠다는 얘기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진태하에게 이런 비참한 꼴을 보여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하음은 4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를 거의 1분이나 들여 걸어갔다.
주설아는 이하음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하음아, 하지 마. 네가 여기서 무릎을 꿇어버리면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뭐가 돼!”
“진태하 씨,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거예요?”
주설아가 진태하를 보며 외쳤다.
“당신 약혼녀가 다른 여자한테 무릎을 꿇으려고 하잖아. 약혼자면, 아니, 남자면 어떻게든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반말까지 하는 걸 보니 확실히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태하는 여전히 남일 보듯 했다.
이하음과는 고작 하루 같이 지낸 사이였다. 그에게는 그녀를 도와줄 의무가 없었다.
그리고 이하음은 강자를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고작 이혜정을 상대로도 이렇게 주눅이 들어서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금방 도태되고 말 테니까.
아무리 부모님과 주설아가 뒤를 지켜주고 있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그들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이하음은 이미 마음속에서 타협을 마친 것 같았다.
진태하는 그 모습에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하음이 무릎을 꿇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백모의 옆을 지나쳐갈 때, 백모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저 여자, 그쪽 여자 친구 아니야?”
진태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갈 길을 갔다.
“자기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게 무슨 남자라고. 초등학생들도 너처럼 배짱이 없지는 않겠다.”
진태하는 문 쪽에 다다른 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연기를 뿜어내려는데 사무실 안쪽에서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철썩!
진태하는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욱신거렸다.
‘어르신들의 약속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이잖아. 그런데 가슴이 왜 이러지? 설마 저 여자한테 벌써 정이 든 건가?’
진태하의 얼굴에 일말의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이... 미친년이! 감히 날 때려?!”
이혜정의 볼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났다. 얼마나 세게 때린 건지 두껍게 발린 파운데이션이 살짝 밀려 버렸다.
이혜정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하음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이봐,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백모가 이하음의 목을 움켜쥐고는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이하음이 이혜정의 뺨을 내리칠 거라고는 상상도 했다. 당연히 무릎을 꿇을 줄 알았으니까. 누가 봐도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백모는 최영훈으로부터 이혜정을 지켜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이혜정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중에서 제일 약한 사람에게 뺨을 맞아버렸다.
만약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최영훈의 부하로 있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손 당장 안 놔?!”
주설아가 백모 쪽으로 돌진하며 다리를 쭉 뻗었다.
하지만 백모의 발차기 한방으로 금세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윽!”
주설아의 몸이 책상에 부딪혔다.
한편 목이 졸려진 이하음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고 눈도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백모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손톱을 세워 그의 손을 할퀴어댔다.
백모가 이혜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씨, 이 여자 죽여도 되죠?”
이혜정은 그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뒤처리는 영훈 씨가 알아서 해줄 거야.”
그 말에 백모는 손에 힘을 가하며 이하음의 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손 하나가 다가오더니 그의 힘을 단번에 무력화시켜 버렸다. 아니, 무력화시킨 게 아니라 이하음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을 한방에 부러트려 버린 것이었다.
백모의 시야에 들어온 남자는 다름 아닌 줄곧 사무실 문 근처에 있던 진태하였다.
진태하는 백모의 힘이 사라지자마자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진 이하음의 몸을 잡아채고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백모가 눈을 크게 뜨며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너...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진태하는 여유롭게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백모의 부러진 오른손을 어깨 쪽으로 확 밀어버렸다.
“으악!!”
백모의 비명과 함께 피가 사정없이 이리저리 튀었다.
하지만 진태하는 자비 따윈 없었다. 그는 무릎으로 백모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하고는 축 늘어진 백모의 몸을 그대로 창밖에 던져버렸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백모의 몸이 딱딱한 시멘트 위로 떨어졌다.
몸이 움찔거리며 떨린 것도 잠시, 백모는 금세 의식을 잃었다.
이혜정은 순식간에 3층에서 떨어져 버린 백모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태하와 눈이 딱 마주쳐버린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며 뒷걸음을 치더니 곧장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진태하는 담배꽁초를 창밖에 버린 후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이하음 쪽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도 이하음이 반격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때 그 표정은 누가 봐도 마음이 다 꺾인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하음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혜정의 뺨을 내리치며 맞서는 것을 택했다.
즉, 이혜정을 향한 두려움을 드디어 극복해 낸 것이었다.
진태하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고는 백모의 피가 묻은 오른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이하음은 진태하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축하해요. 두려움을 극복했네요.”
진태하가 이하음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이하음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이혜정의 뺨을 내리쳤으니 용진 그룹과의 계약은 물 건너간 거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회사가...’
진태하는 이하음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저도 모르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있는 한 하음 씨가 길바닥에 나앉을 일은 없을 겁니다.”
이하음이 고개를 들어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네, 뭐 하면 피시방이나 찜질방으로 가면 되니까요.”
“이씨... 짜증 나!”
이하음이 주먹을 말아쥔 채 진태하의 가슴을 퍽퍽 때렸다.
데구루루.
그때 주설아가 두 사람 쪽으로 볼펜을 던졌다.
“애정행각은 그쯤하고 나 좀 신경 써 주지?”
이하음은 그 말에 얼른 진태하의 품에서 나와 주설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설아야, 너 괜찮아?”
“괜찮아. 죽을 정도는 아니야.”
주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뼈가 다 뒤틀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댔다.
하지만 아픈 와중에도 그녀의 눈빛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방금 그 남자의 주천 공력은 적어도 9단이었어. 그런데 진태하 앞에서 반격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당하고 말았지... 진태하 저 남자, 대체 정체가 뭐지?’
이하음은 주설아의 팔을 부축한 채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5분도 안 돼 직원들이 올라와 사무실을 정리했다.
그들에게 뒤처리를 맡긴 후 이하음은 주설아와 함께 의무실로 향했다.
진태하는 복도로 나와 안성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틀 연속으로 나한테 전화를 걸어주다니, 이거 너무 영광인데?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하...”
“용진 그룹에 관해 아는 거 있어?”
진태하는 안성재의 말을 끊어버린 후 간단히 용건만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