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다른 여자를 향한 그의 다정함
결국 박소윤은 이가희에게 골수를 기증했다. 이나연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막아보려 해도 박재혁이 내린 결정은 아무도 뒤집을 수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딸아이의 얼굴을 보자 이나연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박소윤의 작은 손을 꼭 붙잡았고 가능하다면 아이 대신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싶었다. 이나연은 어떤 고통이든 어떤 고문이든 차라리 자신이 당하길 바랐다.
골수 이식 후 박소윤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의식은 없지만 고통의 흔적은 그대로 얼굴에 남았다.
“아빠...”
박소윤이 마른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아빠, 왜... 왜 저를 보러 안 와요?”
“저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진짜 노력했는데... 아빠는 왜 나를 안 좋아해요?”
박소윤의 잠꼬대를 듣자 이나연의 눈물이 더 많이 흘렀다.
겨우 네 살의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는 아빠가 자신을 싫어하고 관심도 주지 않는 이유가 자기 잘못이라 생각했다.
이나연은 박재혁이 지금 이가희와 그들의 아이 곁에 있을 것이고 세 사람이 같이 있는 그 평화로운 장면 속에 자신이 끼어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딸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윈 내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가희는 박재혁의 품에 파묻혀 있었고 얼굴을 찡그리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배가 너무 아파...”
“조금만 참아, 가희야.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곧 괜찮아질 거래.”
평소에는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던 박재혁은 이가희에게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나연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도 배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픈데 그녀가 아프다고 하면 박재혁은 ‘죽어도 싸다’고 했다.
이나연은 애써 고개를 들어 눈물을 삼키고는 박재혁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박재혁, 우리 얘기 좀 해.”
“오빠, 언니랑 얘기하고 와. 언니가 아이도 잃었는데... 마음이 많이 아플 거야.”
이가희는 사려 깊은 척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가희, 착한 척하지 마!”
이나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이고는 앞으로 더 다가가 박재혁의 손을 붙잡았다.
“박재혁, 밖에 나가서 얘기해!”
박재혁은 본능적으로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손등 위로 튀어나온 핏줄과 뼈마디를 본 순간 차마 떼어내지 못했다.
‘며칠 사이에 왜 이렇게 말라버린 거야?’
둘은 병원 건물 아래로 내려왔고 이나연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말을 꺼냈다.
“가서 소윤이를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소윤이가 아빠를 너무 보고 싶어 해.”
“아빠가 보고 싶으면 자기 아빠한테 가라 그래. 왜 날 찾아왔어?”
박재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눈에 온기라고는 없었다.
“내가 너한테 당하다 못해 익숙해진 줄 알아?”
그 말에 이나연의 마음은 바닥에 내던져진 듯 부서졌지만 아빠를 애타게 찾던 박소윤의 눈빛이 떠오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부탁할게. 그냥 한 번만 가서 소윤이 손 좀 잡아줘. 제발...”
이나연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앞으로 다가가 박재혁의 품에 안겼다.
“앞으로 우리 잘해보면 안 될까?”
박재혁은 무심결에 손을 뻗었고 이나연을 꽉 안고 싶었다. 둘이 얼마 만에 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손이 이나연의 등에 닿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자 이가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큰일 났어! 누가 우리 애를 데려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