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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의사가 달려왔을 때 성보람은 세면대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옷을 빨고 있었고 배선우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간호사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떠올리며 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배선우 씨, 부모님께 연락드릴까요?” 60대 중반의 백발인 부모님이 달려오는 모습을 상상한 배선우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두 분... 서로를 이겨 먹겠다고 유치하게 이러지 마십시오. 다들 어린아이도 아니시잖아요.” 성보람은 눈물을 글썽거린 채 화장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선생님, 저 고작 스무 살이고 아직 학생이에요.” 얼굴만 보면 열여덟 살이라고 해도 의사는 믿었을 것이다. 의사가 흠칫 놀랐다. “나이가 몇 살이든 선우 씨는 지금 환자예요. 선우 씨 두리안 냄새에 알레르기가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책임질 수 있어요? 그리고 선우 씨는 일단 몸부터 잘 추스르세요.” ‘곧 서른을 바라보는 사람인데 장난 좀 그만 쳐.’ 의사는 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에 꺼내진 못했다. 의사가 떠난 후 배선우는 멍한 표정으로 성보람을 쳐다보았다. “너 스무 살밖에 안 됐어?” “아니요. 스물두 살이에요.” 성보람이 세면대 문턱을 두드리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배선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긴 해도 스무 살인 것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한테는 왜 거짓말했어?” “그거야... 나이가 어리면 유치한 짓을 해도 이해받을 수 있잖아요.” 성보람이 촉촉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난 선우 씨처럼 나이를 가득 먹었는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성보람...” 배선우는 또다시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사모님...” 간병인이 긴장한 얼굴로 성보람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만하세요, 제발.” “알았어요.” 성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선우 씨 아직 환자인데 잠깐이라도 화해하는 게 어때요? 날 싫어한다는 거 알아요. 사실 나도 선우 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선우 씨랑 결혼한 건 오로지 그 4백억 원 때문이라고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요.” 배선우는 심호흡하고는 눈앞의 그녀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웬일인지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무슨 뜻이야? 내가 4백억보다 매력이 없다는 거야? 됐어. 얘가 나한테 빠지면 더 골치 아파져. 가뜩이나 날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엄청 많은데.’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보람이 말을 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둘은 손잡는 게 맞아요. 이혼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잖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배선우도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선우 씨 아버지가 우리 이혼을 반대하고 계시니까 선우 씨 아버지가 날 미워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성보람이 분석했다. “지금은 병원이라 아버님을 뵐 수 없으니 선우 씨가 다 낫고 본가로 돌아가서 아버님이랑 한집에 살 때 그때 날 싫어하게 할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네 성격이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아버지가 널 싫어하실 거야.” 배선우가 말했다. “...” 그녀는 못 들은 척하고 할 말만 했다. “그래서 잠시 화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배선우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자 성보람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딜 봐서 지금 부탁하는 것으로 보여?’ 성보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배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잠시 동의해주지.” 그녀는 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오만하기 짝이 없어.’ “선우 씨,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돼요?” 배선우는 성보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실눈을 뜨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열여덟 살밖에 안 된 것 같아서요.” 성보람이 피식 웃었다. “지금 이게 화해하겠다는 사람의 태도야?” 배선우가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선우 씨도 화해할 마음이 딱히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 이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배선우가 병원에서 정말 화병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배씨 가문에서 그녀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꾹 참았다. ‘됐어. 마음이 넓은 내가 참아야지.’ 성보람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배선우와 말도 섞지 않았고 최대한 마주치지도 않았다. 드디어 배선우가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운전기사가 직접 두 사람을 배씨 본가로 데려다주었다. 앞으로 배정헌, 김미경, 그리고 배혁수네 부부와 한집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성보람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래 계획은 과부가 되면 본가에서 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면 배씨 가문 사람들과 만날 일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흘러갔다. “네가 했던 약속 잊지 마.” 옆에 있던 배선우가 갑자기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약속요?” 성보람이 미처 반응하지 못하자 배선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네가 했던 말 잊은 건 아니지? 어떻게든 아버지의 미움을 받겠다고 했잖아.”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선우 씨 아버님이 날 싫어할 거라면서요?” 배선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게 며칠 전인데 아직도 속 좁게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성보람, 아무튼 약속 꼭 지켜.”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매달린다고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나중에 내가 죽은 후에 재산을 물려받을 생각이라면 미안한데 재단에 기부할지언정 너한테는 한 푼도 남겨줄 생각이 없어.” “재벌들은 다 똑같은 병이 있나 봐요. 자기가 매력이 엄청 넘친다고 착각하는 병 말이에요.” 성보람이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차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양대은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며칠 동안 성보람을 만나면서 그녀가 사람의 화를 돋우는 데는 참으로 일가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러로 보니 배선우의 낯빛이 또다시 어두워졌다. ‘됐어. 사모님을 만난 후로 표정이 좋은 적이 없으셨는데, 뭐.’ ... 차가 본가 안으로 들어갔다. 배정헌과 김미경, 그리고 조민주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아들, 드디어 무사히 퇴원했구나.” 김미경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아들의 손을 잡았다. “몸은 괜찮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가슴이 불편해요.” 배선우가 잘생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김미경이 조급해하며 물었다. “가슴이 왜? 의사한테 검사받아봤어?” “어머니, 이건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에요.” 배선우는 뒤에 서 있는 성보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만 보면 가슴이 불편해요.” 김미경이 말을 잇지 못하자 조민주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싫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한다면 저라도 불편해서 못 견딜 것 같아요.” 배정헌이 큰며느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때 성보람이 앞으로 나서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님, 저와 선우 씨는 서로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요. 전에는 배씨 가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결혼한 거예요. 이젠 선우 씨도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 억지로 함께 지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그 말에 배정헌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넌 참 솔직한 아이구나. 빙빙 돌려 말하는 법이라곤 없어. 볼수록 마음에 들어, 아주. 이혼은 절대 안 돼. 선우가 너처럼 착한 아이를 잃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 집에 있어. 쟤가 마음에 안 들면 쟤더러 나가라고 해.” “...” 배선우는 성보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눈빛으로 무섭게 노려보았다. 성보람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배정헌이 그녀를 점점 마음에 들어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버님, 저는...” “됐어. 병원에서 며칠 동안 지내느라 힘들었을 텐데 얼른 들어가서 밥부터 먹어.” 배정헌은 손을 저으면서 두 사람의 짐을 방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후 배선우는 성보람의 귓가에 대고 싸늘하게 말했다. “네 속셈이 훤히 보여.” 성보람은 억울해서 미칠 것만 같았지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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