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심두혈의 조건
안소민이 눈을 다시 떴을 때, 구공주가 향낭에서 꺼낸 것은 놀랍게도 안지연의 작은 초상이었다.
“오라버니가 지연의 작은 초상을 몸에 지니고 계시네요? 정말 특히 아끼시는군요.”
그러자 김서준이 옅게 웃었다.
“그렇다. 보지 못할 때 그리움을 달래려 할 뿐이다.”
사방에서 부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때 한 규수가 슬며시 말을 보탰다.
“그런데 이 향낭의 바느질은... 큰아씨 솜씨가 아닌 듯합니다.”
김서준이 담담히 답했다.
“지연을 수고시키고 싶지 않았다. 손을 다칠까 염려도 되어 자수 공에게 따로 맡겼다.”
그 말에 안소민의 가슴이 얼음물에 던져진 듯 식어 갔다.
김서준이 그 향낭을 받은 까닭이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안소민을 그저 자수를 하는 사람쯤으로 여겼기에 안소민의 초상을 버리고 안지연의 초상으로 바꾸어 넣은 것이다.
구공주가 성가신 듯 안소민을 보았다.
“내 오라버니와 지연이는 두 마음이 한결같고 하늘이 맺은 인연이다. 아무나 헤칠 수 없다. 안소민, 이제 믿겠는가?”
안소민이 고개를 숙여 또박또박 말했다.
“네. 전하와 언니의 정은 쇠보다 굳고, 평생 함께하실 분들입니다.”
김서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려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으나 더는 말하지 않았다. 향낭을 거두어 들고 안지연의 손을 이끌어 자리를 떠났다.
그날 밤, 안소민은 곧장 믿을 만한 장인을 불러 비밀 통로를 완전히 막게 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 지난 3년의 광기를 통째로 묻어 버렸다.
“아가씨, 모두 마무리했사옵니다.”
장인이 낮은 소리로 알리자 안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례로 분주하니 이런 자잘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겠지.’
그러나 다음 날 깊은 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찰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야행의 옷차림을 한 김서준이 문간에 서 있었고 눈빛에는 노기가 역력했다.
“왜 비밀 통로를 막았느냐.”
김서준의 차가운 물음이 떨어졌다.
안소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집안 어른들께 들킬 뻔했습니다. 전하께서 언니를 염려하시는 줄 알기에 사달이 나지 않도록 먼저 막았습니다.”
김서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번에는 옳게 처리했다. 그러면 다른 집을 마련하겠으니 너를 그리로 옮길 방도를 찾을 것이다. 잠시 기다려라.”
쓰디쓴 맛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전하, 머지않아 언니와 혼례를 올리실 터인데 어찌 저를 놓아주지 않으시고, 저더러 다른 인연을 찾게 하지 않으십니까?”
뜻밖의 물음에 김서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게 답했다.
“넌 이미 나 때문에 순결을 잃었으니, 내가 책임지겠다.”
안소민이 비웃음 같은 미소를 흘렸다.
“책임이라는 게 명분도 자리도 없이 숨어 살라고 하시는 일입니까? 아이조차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김서준은 안소민이 피임 탕의 일을 알아챘음을 눈치채고 단호히 잘랐다.
“내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양보다. 내 아이는 황실의 혈통이니 오직 지연만이 낳을 것이다. 네가 한평생 부귀를 누리며 살게 하려 하니, 더는 넘보지 마라. 고분고분 내 말을 들으라. 너를 시집보내는 일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이 되어 안소민의 심장을 찔렀다.
안소민은 더는 얽히지 않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뜰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이닥쳤다.
“전하, 큰아씨께서 기절하셨사옵니다!”
그러자 김서준의 안색이 삽시간에 굳었다. 말을 잇지 않고 내달렸다.
안국공부 안, 어의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김서준은 침상 곁을 지키며 창백해진 안지연의 얼굴만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초조가 그득했다.
“큰아씨의 병은 타고난 것에 한기가 몸에 많은 탓입니다.”
노어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가까운 혈육의 심두혈을 약에 써야 하옵니다. 되도록 나이가 비슷하고 기운이 왕성한 규수가 좋사옵니다.”
김서준이 번뜩 눈을 들었다.
“여봐라, 둘째 아가씨를 모셔 오라!”
얼마 지나지 않아, 안소민이 호위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안소민은 침상 위에 의식을 잃은 안지연을 보고, 다시 김서준의 다급한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 한복판이 찢어지듯 아려 왔다.
“저 여인의 심두혈을 쓰라.”
김서준이 냉정하게 명했다.
그 순간, 안소민은 몸 전체가 냉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수없이 사람들 앞에서 안지연이 적녀의 신분을 내세우며 안소민과 박서희를 모욕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했던 모진 말과 업신여기는 눈빛이 생생했으나, 이제는 심두혈까지 도려내라고 한다니...
“전하.”
안소민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저는 원치 않습니다.”
김서준의 눈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네 뜻대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더니 낮고 매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부하면 내일 네 어미를 안국공부에서 내쳐 거리로 내몰겠다.”
안소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병약한 어머니가 쫓겨나기라도 하면...’
“좋습니다.”
마침내 안소민에게서 입술이 떨리는 소리가 나왔다.
“제 심두혈을 쓰게 하겠으나, 그 뒤에 전하께서 제 조건 하나를 들어 주셔야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