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강도훈이 이혼 얘기를 꺼낼 때마다 소이현은 잠시 집을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들어왔고 들어온 후에는 더 잘해줬다.
과거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여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오늘 더 냉랭하게 집을 나간 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
강도훈의 두 눈에 짙은 혐오감이 스쳤다. 소이현 같은 여자는 그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생긴 건 그저 실수였다.
아이를 잃은 게 오히려 그에게는 더 잘된 일이었다.
...
이혼하면 위자료가 100억 원이었다.
은행 카드와 이혼 합의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만약 소이현이 3년 전에 사인했더라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것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착각 속에 산 그 세월 동안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정도로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몸이 상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었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소모전은 그만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돈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소이현은 은행 카드를 챙겼다. 밤늦게 택시를 잡고 프리 아파트로 향했다. 이곳은 평당 6천만 원부터 시작하는 고급 아파트였고 한 층에 두 가구만 사는 구조였다.
그녀의 명의로 된 아파트가 이곳에 한 채 있었다.
원래는 외삼촌의 것이었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외삼촌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이 집을 소이현에게 남겨줬다.
이 집에서 살 일이 평생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혼 후에도 갈 곳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7동 꼭대기 층 1호.
소이현은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에 미리 청소 업체를 부른 덕에 집이 아주 깨끗했다. 백 평에 달하는 큰 집이라 공간이 넓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예전이었더라면 홀로 넓은 집에서 사는 게 너무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을 터. 하지만 3년 동안 강도훈의 냉랭함을 버텨온 지금은 두려운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이 피어올랐다.
지칠 대로 지친 소이현은 얼른 씻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따르릉.
아침 6시, 익숙한 알람 소리에 그녀는 눈을 떴다. 남편의 아침 식사 준비 때문에 설정해놓은 알람이었다.
소이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도훈이 보통 8시에 아침 식사를 하는데 입맛이 까다로워 만드는 데만 한두 시간이 걸렸다.
전날 밤 술자리를 하다 늦게 들어오면 소이현은 그를 다 챙긴 다음에 새벽 두세 시가 돼서야 잠들곤 했다. 그래도 다음 날에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때로는 공들여 차려도 강도훈이 먹지 않을 때가 있었다. 결국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고 그녀의 노력이 무색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소이현은 알람을 삭제하고 안대를 낀 다음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자지 못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내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
아침 8시. 강도훈이 눈을 떴을 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과음한 후에 숙취해소제를 먹지 않으면 다음 날 항상 머리가 아팠다. 어젯밤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숙취해소제를 먹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젠장. 너무 아픈데.’
침대 옆 서랍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강도훈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단호하게 나가더니 결국 다시 돌아왔네?’
따뜻한 물을 마시고 나니 두통이 조금 가라앉았다. 휴대폰을 집어 고태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이겼어.]
고태훈은 어이가 없었다.
[이현 씨는 한 번만이라도 좀 세게 나오면 안 된대? 정말 너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기세야.]
[진 게 너무 억울해.]
[젠장, 생각할수록 열 받네. 날 미친 듯이 사랑해줄 여자 좀 소개해줘, 제발. 나도 누려보자.]
강도훈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징징거리지 마.]
그러고는 휴대폰을 던져 놓고 일어나 씻었다. 그런데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분주히 움직여야 할 소이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현이는요?”
강도훈이 싸늘하게 물었다.
그때 이순자가 아침 식사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대표님, 일어나셨네요. 아침 준비 다 됐어요.”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주머니?”
“네. 왜 그러세요?”
“아까 그 물도 아주머니가 가져다 놓은 거예요?”
이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사모님께서 오늘 집에 없으니까 저더러 일찍 와서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강도훈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본 이순자는 겁이 덜컥 났다.
“대표님, 아침부터 드시죠...”
강도훈은 자리에 잠깐 서 있다가 결국 찌푸린 얼굴로 식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식탁 위에 우유 한 잔과 토스트 두 조각, 계란 프라이 하나, 그리고 치즈밖에 없었다.
평소 소이현은 아침에 항상 구첩반상을 차려주곤 했고 게다가 메뉴도 매일 달랐다.
구첩반상에 비하면 지금 이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방금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타올랐다.
강도훈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다인가요?”
그의 질문에 이순자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죄... 죄송해요, 대표님. 지금까지 사모님이 아침을 하셔서 대표님의 입맛을 잘 몰라요.”
“모르면 전화해서 물어봐야죠.”
이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전화했었는데 안 받으세요...”
강도훈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소이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하지만 강도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어쩌면 점심에 회사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소이현이 썼던 우회적인 수법이었다.
입맛이 없어진 강도훈은 한 입도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이순자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다급히 소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몇 번을 걸었지만 계속 받지 않았다.
이순자는 이내 어떻게 된 건지 짐작했다.
‘대표님께서 또 이혼하자고 했나 보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소이현은 이순자에게 전화하여 강도훈의 상황을 물었고 타이밍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전화를 받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모님 지금 밀당하시는 건가? 가출을 오래 해서 대표님이 사모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려고. 나름 괜찮은 방법이긴 해.’
강도훈의 마음이 소이현에게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강도훈이 능력 있는 남자라 곳곳에 유혹이 가득했다. 그의 마음을 잡으려면 소이현이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
토요일이라 소이현은 출근하지 않고 점심까지 푹 잤다.
장을 볼 시간이 없었기에 배달 음식을 아주 푸짐하게 시켰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과학 기술 포럼을 둘러봤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이젠 업계의 리더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스승의 소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이현의 기억이 맞다면 스승은 지금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 스승의 눈빛은 어머니의 눈빛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승을 저버리고 말았다.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연아, 잠깐 만날까?”
박지연은 소이현의 대학교 동창이었다. 예전이었더라면 소이현의 전화를 받고 무척이나 기뻐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만나자고 열 번 전화하면 아홉 번은 약속을 어기잖아. 계속 이렇게 관계를 이어가는 건 좀 힘들 것 같아.”
박지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잘 생각해. 정말 날 만나고 싶은 거 맞아?”
소이현은 결혼 후 항상 가정을 우선시했다. 친구가 섭섭지 않게 노력하려 했지만 결국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그동안 박지연은 사업에 매진했다. 그 덕에 회사가 업계에서 주목받는 신예 기업으로 떠올랐다.
친구와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걸 느낀 소이현은 자신감을 잃어갔고 그렇게 먼저 연락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소이현이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했다.
“나 이혼했어.”
박지연이 말이 없더니 한참 후에 짧게 말했다.
“시간, 주소.”
...
소이현은 이혼 서류를 들고 가정 법원에 가서 이혼 신청을 했다. 30일의 숙려 기간이 지나면 이혼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을 끝냈는데도 아직 세 시가 되지 않았다. 박지연과 만나기로 한 카페에 미리 도착하여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절반쯤 마셨을 때 소이현은 저도 모르게 커피잔을 움켜쥐었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하루도 안 되어 강도훈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