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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내가 왜 너한테 잘해주는 것 같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에 있은 터라 표정을 똑똑히 볼 순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주성훈은 이미 대문 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차피 들킨 이상 내려가 맞이하는 게 예의였다. 내 복장을 내려다보니 여전히 잠옷, 도저히 이렇게 나갈 순 없어 얇은 외투를 걸쳤다. 이 옷들도 모두 저택에 들어온 뒤 도우미들이 챙겨준 것들이었다. 내 물건들은 여전히 신세계 아파트에 있었지만 주경민에게 일부러 함께 가자고 말하긴 귀찮아서 그냥 미뤄두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주성훈이 거실의 커다란 통유리창 옆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밝은 조명이 대낮처럼 환히 비추는 실내, 그리고 그 속에서 또렷이 드러난 그의 넓은 어깨와 곧은 등. 창밖에는 어두운 마당과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있었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하얗지만 주성훈은 마침 그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더 신비롭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시선은 그의 손으로 내려갔다. 길고 하얀 손가락, 나는 손도 이렇게 예쁠 수 있다는 사실에 순간 넋이 나갔다. 그때, 주성훈이 불현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깊고 그윽한 눈빛은 마치 봄날의 깊은 연못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와 몇 미터 간격을 둔 채 서 있었다. 주성훈은 전화를 끊고 곧장 내 쪽으로 걸어왔다.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어디다 손을 둬야 할지도,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주성훈은 딱 한 번 나를 훑어보고 말했다. “따라와.” 다시 만난 첫마디가 이럴 줄은 몰랐다. 그는 이미 몸을 돌려 서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서재는 아주 단출했다. 가구도 몇 개 없고 뒤쪽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책상 위에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을 뿐. 방이 넓고 한산해서인지 희끗한 조명 아래 벽지의 따뜻한 색조마저 차갑게 느껴졌다. 이곳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거실과 2층 내 방 외에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괜히 주성훈이 싫어하는 선을 넘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재에 들어선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아저씨. 이번에도 폐를 끼쳤네요.”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말없이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고 나는 의아해하며 받아 열어봤다. 그리고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내 학적 서류였다. 예전에 양 선생님이 학적이 이미 옮겨졌다고 했을 때, 나는 당연히 소석진이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학교에 돌아갈 방법이 막힌 거나 다름없었는데 그게 지금 내 손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 주성훈을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학적은 네가 가지고 있어. 제국대 의대 학생 신분은 그대로니까 언제든 돌아가고 싶을 때 가면 돼.” 너무 놀란 탓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동안 소석진과 강민지의 괴롭힘 다음으로 가장 두려웠던 게 바로 퇴학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 없이 그걸 해결해 버린 것이다. 정말 은인이라는 말로도 부족했고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아마 내가 계속 말을 잃은 채 서 있었기 때문일까, 주성훈의 시선은 내 두 손으로 내려왔다. “실험을 못 할까 걱정이라면 반년 정도 휴학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손이 완전히 회복되면 다시 학교 가면 되고.” 의대를 다니려면 당연히 임상 실습이 필요하다. 그는 그 점까지 미리 생각해 두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주성훈은 여전히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 때문에 그의 표정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문득 구소연의 얼굴이 스쳤다.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고 속으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은인을 두고 마음이 흔들리다니. 게다가 나 같은 여자에게 주성훈이 눈길을 줄 리 없으니 기껏해야 짝사랑으로 끝나는 게 뻔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았고 주성훈 또한 말이 없었다. 서재는 고요했고 바깥에는 짙은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벌레 울음과 매미 소리가 간간이 스쳤다. 그 고요함이 버거워진 나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마침 주성훈도 나를 보고 있었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조용히 말했다. “저... 반년 동안 먼저 쉬고 싶어요.”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말해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만 내려다보며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아버지 결혼식에 아저씨가 저를 데리고 가주실 수 있나요?” “그래.” 주성훈이 너무나 바로 수락하는 바람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또 부탁할 거 있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금 오셨는데 피곤하시죠? 이제 더 방해 안 할게요.” 주성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은진아.” 낯선 말투와 목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 주성훈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저음에 살짝 거친 울림이 섞인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지?”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 질문은 사실 내가 가장 많이 고민하던 것이었다. 소석진과 강민지는 분명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씨 저택에서 나간다면 다시 덮쳐올 게 뻔하다. 그렇다고 평생 주성훈 곁에 얹혀살 수는 없다. 물론, 그의 힘을 빌려 그 둘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주성훈은 이미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걸 해줬기에 더 이상은 차마 부탁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냥 침묵했다. 그러자 주성훈이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내 키보다 훨씬 큰 탓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주성훈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자 긴장한 나는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잠시 후, 그가 먼저 물었다. “복수하고 싶어?” 그 질문은 내가 잠잘 때도 떠올리는 바람 같은 욕망이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망설였고 꾹 참았다. 그러자 주성훈이 더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스치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구소연이랑 파혼한 건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곧 주성훈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구씨 가문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한테 여자 친구가 필요해.” “네?” “네가 내 여자 친구가 되면 내가 그 두 사람 해결해 줄게.” 나는 여전히 얼이 빠진 채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억울하게 들어가서 생겨버린 정신 병력도 내가 지워줄 수 있고.” 그 말을 듣자 조금 민망해졌다. 물론 나는 진짜 환자가 아니지만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였다. 주씨 가문의 힘이라면 그는 정말 그 둘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하지만 대가가 그의 연인이 되는 거니까 당황한 나는 망설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뒤엉킨 생각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몇 번이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복수 얘기는 솔직히 끌려요. 그렇지만 전 아저씨 여자 친구 역할은 못 할 것 같아요. 아마 구소연 씨도 믿지 않겠죠. 저 같은 애를...” 사실 구소연은 무서운 여자였다. 그녀의 보복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까지 해준 걸 생각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다. 설령 그게 가짜 연인 역할이라 해도, 설령 구소연의 위협에 시달린다 해도 그럴 각오는 있었다. 다만, 나는 잘 안다. 내가 주성훈과 어울릴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구소연이 믿을 리 없다는 것도. 그때, 주성훈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구소연이 안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나는 멍해졌다. “넌 내가 왜 너한테 잘해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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