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주성훈의 약혼녀
얼어붙어 버린 나를 보자 주성훈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경호원들 시켜서 네 움직임을 지켜보게 하지 않았다면 넌 지금쯤 경찰서에 있었을 거야.”
‘내게 경호원을 붙였다고?’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숙이 밀려온 나는 고개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이 정도는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내 말에 주성훈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버거워 무심결에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거의 속삭이듯 계속 말했다.
“사실은 일부러 다쳤어요.”
원래는 이 상처들을 이용해서 경찰 쪽까지 엮어 한꺼번에 고소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주성훈이 나타나 나를 구해줬고 그 덕분에 일이 예상보다 훨씬 간단해졌다.
이제는 내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나한테 훨씬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얼른 고개 숙여 다시 한번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성훈은 묵묵히 나를 바라봤다.
화림의 밤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그 네온 아래에서 더 깊고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아직도 주성훈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걸 마음에 두고 있는 줄 알고 서둘러 말했다.
“앞으로는 아마도 종종 아저씨께 신세를 질지도 몰라요.”
그제야 그의 미간이 살짝 펴졌다.
“그래.”
그 대답에 나도 조용히 입을 닫았고 주성훈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난 그가 이제 떠날 줄 알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주성훈은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살짝 망설이다가 솔직히 말했다.
“모레 학교로 돌아가려고요.”
주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지금 구속돼 있긴 하지만 어쨌든 네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한 건 없으니 내가 막는다 해도 열흘 남짓이면 풀려날 거야.”
그건 나도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고개를 들자 주성훈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난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그 사람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요.”
내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건지 주성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곧 나는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엄마가 이제 막 떠났어요. 저는 조금이라도 편히 눈 감을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나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다시 입을 뗐다.
“강민지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내 말에 주성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조금 불편했지만 그 앞에서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미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주성훈 앞에서 괜히 연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몇 초의 정적을 뚫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강민지가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는 분명 강민지와 결혼하겠죠. 그러면 강민지는 소씨 가문의 새로운 안주인이 될 거고 가문의 모든 재산을 손에 넣겠다고 악을 쓰겠죠. 저는 그때 다시 손을 쓸 거예요.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진짜 고통스러우니까요.”
주성훈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웃고 있는 건가?’
그의 눈동자에는 어쩐지 미묘한 칭찬 같은 감정이 스쳐 갔다.
설마 내 수단을 나쁘게 여기지 않는 건가?
나는 한 번 더 확실히 말했다.
“강민지가 우리 엄마를 4년이나 괴롭히고 결국 옥상에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에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강민지만이 아니었다.
소석진 역시 내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다.
나는 천천히, 하나씩 모든 걸 되찾을 것이다.
하지만 주성훈은 그 말에조차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 내 분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용히 말했다.
“필요하면 내게 연락해.”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너무 독하거나 무섭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주성훈은 오히려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고맙다고 말하려는 찰나 문득 옆길에 주차된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차에서 한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웠다.
강렬한 붉은색의 몸에 딱 붙는 롱드레스를 입고 아찔할 정도로 잘빠진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모습마저 물결처럼 흔들리는 자태였다.
그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훔치는 미모였다.
오목조목 뚜렷한 이목구비에 시선을 사로잡는 눈매와 당당한 분위기.
그녀는 주성훈 앞에 다가서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끼고 부드럽게 웃었다.
“성훈아, 소개 안 해줄 거야?”
그러자 주성훈이 대답했다.
“여기는 소은진.”
여자는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전 구소연이라고 해요. 성훈이 약혼녀기도 하고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는데 미소는 단정했고 목소리도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하지만 눈빛에 드러난 경계심과 탐색의 기운은 분명했다.
그녀는 아마 나와 주성훈 사이에 뭔가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주성훈은 그저 우리 엄마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슬쩍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구소연은 내 손끝을 가볍게 스치기만 하고는 곧장 손을 거두었다.
그 뒤로는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다정하게 주성훈의 어깨에 기댔다.
살짝 기대는 그녀의 몸짓과 말투는 의도적으로 다정해 보였다.
“차 안에서 한참 기다렸어요.”
주성훈은 구소연을 한 번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건 그녀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나도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저씨, 오늘 정말 감사했어.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내가 몸을 돌려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주성훈이 불러 세웠다.
“지금은 너무 늦었어. 사람 붙여서 데려다주라고 할게.”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보디가드 몇 명을 불렀고 본인은 구소연과 함께 맨 앞 차량에 올라탔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거절하지는 않았다.
굳이 더 민폐 끼치고 싶진 않았지만 이 늦은 밤에 누군가 함께 있어 준다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차가 별장에 도착하자 나는 정중하게 보디가드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가구들과 배치가 눈에 들어오자 그리운 마음보다는 꽉 막힌 듯한 먹먹함이 밀려왔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소석진은 그나마 절제할 줄 알았고 엄마와도 그럭저럭 조화를 이루었다.
내 기억 속 집은 언제나 따뜻하고 웃음이 넘쳤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이 집은 완전히 소석진과 강민지의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언젠가는 이 집과 이 안의 모든 것을 다시 되찾을 거니까.
나는 짐을 챙기며 다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제도로 돌아가자.’
하나는 소석진과 강민지가 출소한 후에 혹시라도 나를 건드리는 걸 피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 과제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의대 본과 4학년이다.
처음부터 난 본과, 석사와 박사 통합 과정을 선택했다.
이번에 엄마 일로 제도에 내려온 걸 알고 지도교수인 양 선생님이 며칠 휴가를 흔쾌히 내주셨다.
사실 그렇게 급하게 복귀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곳 화림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어차피 떠날 곳이라면 가능한 빨리 돌아가서 과제나 끝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부터 끼얹어진 찬물 한 바가지에 나는 벌떡 깨어났다.
초여름이긴 했지만 아침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고 몸을 덮친 찬 기운에 오들오들 떨면서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침대 머리맡에 서 있는 중년의 뚱뚱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손엔 세숫대야를 들고 있었고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
강민지의 어머니, 이선아였다.
‘평소엔 다른 별장에서 살던 사람인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지?’
곧장 기억이 떠올랐다.
집 안 도우미들은 이미 모두 강민지 쪽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이선아가 내 방에 들어온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제 그냥 호텔에 묵을 걸... 괜히 집에 왔다가 이런 꼴을 당했네.’
“이 시*년! 우리 딸 감옥 간 게 다 네 탓이야.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욕설과 함께 이선아는 세숫대야를 내던지더니 내 잠옷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러고는 내 목을 그대로 조여왔다.
진짜 날 죽일 기세였다.
찬물에 젖은 온몸이 떨리고 목까지 조여오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렇지만 이선아의 손아귀는 상상 이상으로 거셌다.
내가 버둥거리자 그녀는는 뺨을 한 대 내리쳤고 곧 나는 눈앞이 핑 돌았다.
이선아는 나를 침대에 내동댕이쳤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선아는 다시 내 옷깃을 잡아채더니 또다시 내 얼굴을 후려치며 윽박질렀다.
“어디 도망가? 이 * 같은 년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발의 젊은 남자 하나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손에는 밧줄을 들고 있었고 입가엔 기분 나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엄마, 그냥 보내주지 말자. 이 여자가 감히 우리 누나랑 조카의 재산을 넘본다고? 내가 오늘 안에 저 여자 이를 죄다 뽑아놓지 않으면 내 성을 고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