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온통 침묵에 잠겼다.
조유나는 심장이 꽉 움켜쥐어지는 듯한 고통에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키스가 끝나고 전소연의 얼굴은 피가 솟을 정도로 붉어졌고 서현석은 그때서야 설명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여기 원래 내 자리였어. 전소연 왼쪽 사람은 나야. 자, 벌칙 끝.”
분위기는 섬뜩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모두가 조유나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안쓰러움과 어색함이 뒤섞여 있었다.
조유나는 주목받고 싶지 않았고 연회가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떠올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호텔을 막 나서자 밤바람이 뺨을 스쳤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차갑게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유나야!”
서현석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쫓아왔다.
“미안해, 화났어?”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화를 내?”
“아까...”
서현석은 다급하게 설명했고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소연이 그 사람이랑 키스하고 싶지 않아 해서 내가 그냥 곤란한 상황에서 빼준 거야. 그냥 키스 한 번인데 그걸로 아무것도 의미 없어. 화내지 마, 응?”
“화 안 났어.”
그녀는 웃으며 손을 빼내며 한 마디씩 말했다.
“이후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때나 얼마든지 전소연이랑 입맞춤해. 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서현석은 그 말에 넋을 잃은 채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조유나는 평온하게 서현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 다른 뜻이 있겠어?’
그저 그를 더는 좋아하지 않게 됐을 뿐,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이제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조유나가 헤어지자고 말하려던 찰나 전소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쫓아 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유나,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전소연은 끊임없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야위어진 몸이 밤바람에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비굴한 모습은 마치 조유나가 무슨 악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현석이랑 싸우지 마. 다 내 탓이야. 혼내려면 나를 혼내.”
서현석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무슨 짓이야? 내가 유나한테 이미 설명했어. 유나는 화내지 않아.”
조유나는 씩 웃으며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안 화났어.”
전소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서현석은 전소연의 손목을 꽉 잡았다.
“잠깐만, 이렇게 늦었는데 너 혼자 집에 가는 거 위험해. 내가 데려다줄게.”
전소연의 눈이 빛났고 그녀는 다시 짐짓 망설이는 듯 조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유나는? 우리 같은 방향이 아니잖아.”
“유나는 신경 쓰지 마.”
서현석의 말투는 자연스러웠다.
“나중에 유나네 기사 아저씨가 데리러 올 거야.”
그렇게 말한 후 그는 전소연을 차에 태웠고 떠나기 전 창문을 내려 조유나에게 당부했다.
“유나야, 조심해서 들어가. 집에 도착하면 나한테 전화해.”
조유나는 그 자리에 서서 차의 후미등이 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서현석은 잊어버렸다.
조유나의 집 기사 아저씨는 휴가를 낸 지 며칠 되었고 며칠 전 이미 서현석에게 말했었다.
예전에는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꼼꼼히 기억했었다. 그녀가 고수에서 어떤 부위를 싫어하는지, 생리통이 며칠 동안 지속하는지, 그녀가 무슨 색 리본을 좋아하는지... 하지만 이제는 이런 것조차 잊어버렸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유나는 호텔 입구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택시를 잡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비를 맞고 걸어가야만 했다.
밤은 어두웠고 길은 미끄러웠다. 그녀는 도중에 오토바이에 치여 넘어졌고 무릎이 땅에 세게 부딪히며 피가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가해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쳤고 그녀는 절뚝거리며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 시간 후 그녀는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조유나는 아픔을 참고 스스로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며 서현석의 문자가 왔다.
[집에 도착했어?]
그녀는 답장하고 싶지 않아 휴대폰을 꺼버렸고 샤워를 마친 후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초인종이 끊임없이 울렸다.
조유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문을 열었다. 서현석이 문 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집에 왔어? 어제 왜 내 문자 답장 안 했어?”
조유나는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다쳐서 일찍 잤어. 못 봤어.”
서현석은 그제야 그녀의 다리에 난 상처를 알아차리고는 순식간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기사 아저씨가 휴가 내서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집에 돌아가다가 오토바이에 부딪혔어.”
서현석은 잠시 멍해졌다가 조유나네 기사가 휴가를 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유나야,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
조유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전화했으면 너는 나를 데리러 왔을 거야?”
“당연하지.”
“그럼 만약 전소연도 무슨 일이 생긴 거랑 동시에 일어났다면? 너의 첫 번째 선택은 여전히 나였을까?”
서현석은 1초 정도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조유나는 입꼬리를 씩 올렸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가 ‘당연하지’라고 말할 때 망설임이 없었다.
그때는 서현석의 눈에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가 눈살만 찌푸려도 그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지금은 단 1초의 망설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됐다.
서현석은 조유나가 화났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며칠씩 말도 안 하고 투정도 부리며 그가 자신을 달래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조유나는 비록 서현석과 말은 하지만 오히려 그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유나야, 우리 해양 파크 갈까?”
서현석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목소리에는 무언가를 만회하려는 듯한, 어쩌면 달래는 말투가 섞여 있었다.
조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갈래.”
“이미 표도 다 샀어.”
서현석은 불쑥 조유나의 손을 잡고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마치 예전에 그녀를 달랠 때처럼 말했다.
“가자, 너 돌고래 쇼 보고 싶어 했잖아.”
조유나는 그가 달래며 끌어당기는 바람에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차 문을 열자 조유나는 뒷좌석에 전소연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유나...”
전소연이 겁먹은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손가락은 마치 그녀가 기분 상할까 봐 두려운 듯 불안하게 치맛자락을 꼬았다.
서현석은 저도 모르게 전소연 앞에 나서며 설명했다.
“소연이도 인스타에 놀러 가고 싶다고 글을 올려서 같이 부른 거야.”
조유나는 그가 전소연 앞에 나서서 보호하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조유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조수석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