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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사모님, 대표님은 당분간 시간이 없으십니다. 큰 인수 건을 막 끝냈고 새 회사 장부가 엉망이라 손댈 곳이 많아요.” 온채하는 더 말이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배승호는 일에 파묻혀 결혼기념일도, 그녀 생일도, 모든 명절도 잊어버렸다. 그가 얼마나 바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온채하였다. “알겠어요. 돌아오면 꼭 연락만 주세요.” “네, 사모님.” 전화를 끊고 가정법원 로비를 멍하니 바라봤다.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 사이로 부부는 서로를 해충처럼 피했다. 온채하는 휴대폰으로 근처 구인 공고를 훑었다. 이력서는 이미 준비해 둔 상태이기도 하고, 먹고 살려면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대학교 전공은 성악이지만 진아린 사건 이후 노래가 두려워 한 소절도 부를 수 없었다. 결국 전공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기업 목록을 살피다가 중소기업 하나를 발견했다. 대표이사 비서 자리였는데, 전공 조건은 없고 키, 몸무게, 외모만 기재되어 있었다. 이력서를 보낸 지 3분 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오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첫 취업이라 수상쩍다 싶었지만 막상 면접실에 앉자 면접관은 얼굴만 훑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 온채하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제 직업 능력에 관해서는 안 물어보시나요?” “음대 나왔다면서요? 여기서는 능력 필요 없어. 대표님이랑 술자리 다니고 서류만 잘 챙기면 돼요. 월급 좋고, 젊을 때만 먹히는 일이니 잘 생각해요.” “할게요.” 입사 서류를 작성하고 대표이사실로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그녀의 이력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때 남자는 배성 그룹의 관리직이었지만 온채하와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그는 술자리에서 그녀를 여자 종업원으로 착각해 강제로 입을 맞추려다가 배승호에게 들켰다. 이후 회사에서 사고를 쳐 물러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자의 이름은 조재우. 지금 그의 컴퓨터 화면에는 온채하의 이력서가 떠 있었다.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네. 너 배승호 여자 아니야? 이 누추한 곳에 취직하려고 오다니 놀랍네. 배승호한테 차인 거야, 뭐야?” 조재우는 뜨거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노트북을 천천히 닫았다. “듣자 하니 네 남편, 벌써 3년째 집에 잘 안 간다더라? 어떻게 이런 미인을 내버려둔 거지?” 온채하는 정말 예뻤다. 잔잔하면서도 눈길을 잡아끄는 아름다움, 보면 볼수록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단정한 청바지와 흰 셔츠 차림으로 사무실에 서 있었고, 그 모습은 맑은 연꽃처럼 섬세했다. “조 대표님.” 그가 딴생각을 품으면 일을 포기할 작정이었지만, 조재우는 콧소리만 흘리며 위아래로 그녀를 훑었다. “월급은 400만 원. 이따가 술자리에 동행해야 하니까 서류 챙겨. 운전은 할 줄 알지?” “네, 압니다.” “좋아. 배성 그룹 사모님이 내 기사라니, 이런 영광이 있을 수가.” “저 배승호와는 이미 이혼했습니다.” 조재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렇겠지. 안 그랬으면 이렇게 예쁜 여자를 놓아줄 리가 없잖아. 지금 바로 입사해. 그리고 오늘 밤 술자리 동행해 줘. 바로 출근할 수 있으면 급여의 절반을 먼저 줄 텐데, 어때?” 그가 어떻게 그녀가 돈이 궁하단 것을 알아챈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맞췄다. 온채하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인사팀 직원이 와서 입사 절차를 밟고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온채하는 몸이 으슬으슬 열이 오르는 듯했지만 참았다. 퇴근이 가까워지자 조재우가 그녀를 부르더니 열쇠를 내던졌다. “온 비서, 앞으로 내 기사 겸 비서야. 지금 바로 출발하자. 최근 일정은 메시지로 보낼게.”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녀는 열쇠를 쥐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문을 열어 준 뒤 운전석에 올랐다. 조재우는 통화로 자랑했다. “하하, 내가 누구를 비서로 뽑았는지 알아? 배승호 기억하지?” 재원시에서 배승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배승호는 배씨 가문에 돌아오기 전부터 이미 잘생긴 자수성가 신예로 유명했다. 후에 족보까지 완벽해지자 더 화제가 됐지만, 최근에는 언론을 피하며 사업에만 집중해 대중 앞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래도 재원에서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다. 조재우는 하층 비즈니스계에 있다고 해도 한때 배성 그룹 관리직에 있었던 덕에 어느 정도 인맥은 남아 있었다. “그래, 그 잘난 사람 아내가 내 운전기사 하러 왔다니까. 옛날에 그 녀석 얼마나 거들먹거렸는데.” 차는 유명 호텔 앞에 멈췄다. 온채하는 주차를 마치고 문을 열어 주었다. 말대로 조재우는 선금 200만 원을 그녀의 계좌에 입금했다. 몇 마디 모욕쯤은 배승호의 곁에서 이미 면역된 터라 대수롭지 않았다. 그녀는 비서답게 앞장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안에 배승호와 성시현이 서 있었다. 성시현의 시선에는 놀라움이 스쳐 갔지만 곧 배승호를 흘긋 보며 입을 다물었다. 온채하도 인사하지 않았지만 조재우가 먼저 말했다. “배 대표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배승호의 기세가 워낙 강렬해 넓은 엘리베이터가 답답해질 정도였다. 조재우가 먼저 들어가며 피식 웃었다. “온 비서, 안 탈 거야? 초대해야 들어오나?” 온채하는 조용히 들어와 5층 버튼을 눌렀다. 5층은 비즈니스 레스토랑, 7층은 더 비싼 프라이빗 룸이다. 배승호의 목적지는 7층이었다. 5층에 도착해 내리려는 순간, 배승호가 낮게 불렀다. “성 비서.” 성시현은 긴장한 모습으로 움찔했지만 배승호의 추가 지시는 없었다. 그냥 부른 것인 듯했다. 온채하는 잠시 멈칫했으나 결국 조용히 걸어 나왔고 문이 바로 닫혔다. 성시현은 숨이 턱 막혀서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제가 곧 알아보겠습니다.” ‘사모님이 왜 여기서 조재우랑 같이 있는 거지?’ 조재우는 예전에 온채하와 억지로 키스하려다가 들켜, 배승호가 크게 화를 내고 강제로 쫓아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자 배승호가 먼저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필요 없어. 알아서 타락하게 내버려둬.” 어차피 아무 남자와도 쉽게 자던 일, 처음도 아니라는 뉘앙스였다. 성시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반면 조재우는 룸 문을 열고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아는 분을 만나 조금 늦었네요.”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그가 새로 거래를 트려는 소규모 협력업체 대표들이었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조 대표님이 새로 뽑은 비서 정말 예쁘네요. 저 정도 외모면 연예인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조재우가 자랑스레 코웃음을 쳤다. “연예인은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별로예요.” 중년 남자들은 곧 음담패설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시선은 끊임없이 온채하를 훑었다. 온채하는 속눈썹을 내려뜨린 채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묵묵했다. 조재우가 턱짓을 했다. “온 비서, 신 대표님께 술 한 잔 따라 드려.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셨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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