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9화

진여울은 배성 그룹의 직원이 아니지만 건물 구조는 훤히 꿰고 있었다. 하지만 온채하는 배승호의 아내로 3년을 살았으면서도 본사 현관이 어느 쪽으로 열리는지조차 몰랐다. 예전 같으면 이러한 현실에 가슴이 저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답답함만 잠시 스쳤다 사라졌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조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혹시 로비 출입 카드 있으세요?” “뭐? 내가 카드도 안 줬어?” “네.” 조재우는 손으로 미간을 주무르며 굳이 사적인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내 친구 내려가게 했으니까 그냥 로비에서 계약서 사인하자. 조항은 미리 다 맞췄어.” “네, 대표님.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온채하는 1층 로비 소파에 앉아 등을 곧게 세운 채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 회전문 밖에서 또 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다가 온채하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요부 같은 년! 너 조재우가 밖에 숨겨 놓은 여자지? 이제 감히 우리 집까지 기어와? 죽여 버릴 거야!” 온채하가 고개를 들자마자 여자는 물병을 그대로 끼얹었다. 피할 새도 없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 여자는 조재우의 아내였다. 아침부터 조재우의 차를 미행하며 온채하를 밖에 둔 여자라 확신했고, 다가오자마자 그녀의 셔츠 단추 몇 개를 거칠게 뜯어냈다. “음탕한 년! 뻔뻔한 년! 다들 보세요, 세상에 글쎄 내연녀가 본처 집까지 들이닥치고 있어요!” 사람들로 북적이던 배성 그룹 1층은 그녀의 고함에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됐다. 온채하는 옷깃을 움켜쥐며 여자를 밀어냈다. “저는 조 대표님의 비서예요. 애꿎은 사람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흥분한 여자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온채하는 한발 물러섰고, 곁눈질로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을 봤다. 맨 앞에는 배승호, 그 곁에는 진여울, 뒤로는 배성 그룹 임원들이 서 있었다. 배승호는 무심하게 이쪽을 바라봤고, 진여울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 진여울이 말했다. 여자는 온채하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통곡했다. “얼굴부터 요부처럼 생겨서는 뭐가 아니라는 거야! 조재우랑 사무실에서 놀아난 거겠지! 10여 년을 뒷바라지한 결과가 고작 이거야?!” 온채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밀려났다. “말했잖아요, 그런 거 아니라고.” 잠시 울던 여자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제발 조재우랑 헤어져 줘, 부탁이야.” 본처가 불륜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는 장면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몇몇은 휴대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한 온채하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곁눈질로 배승호가 이미 떠나는 모습을 봤다. 그 곁에서 진여울은 웃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두 사람은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은 사이, 여자는 테이블 위 화병을 집어던졌다. “죽어라! 이 년아!” 원래도 몸이 약했던 온채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그림자가 보였지만, 이마에서 흐르는 따뜻한 무언가가 시야를 흐리게 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 침대 곁에는 조재우가 어두운 안색으로 서 있었다. “그 여자가 온 비서를 따라갈 줄은 몰랐어. 이번에는 내가 온 비서를 귀찮은 일에 끌어들였네.” 지친 표정의 조재우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밖에 여자를 둔 적 없어. 근데 그 여자 절대 안 믿어. 수도 없이 설명했는데 매번 받아들이지 않아. 견디다 못해 이혼하자고 했더니, 오히려 내가 바람피운다고 확신해. 지난 2년 동안 회사마다 찾아와 소란 피워서 세 군데 연달아 잘렸고, 그래서 지금 회사로 옮긴 거야.” 어쩐지 배성 그룹 관리직이었던 조재우가 중소기업에 있는 게 이상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대표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다주신 거예요?” 조재우의 시선에 잠시 의문이 스쳤다. “나는 경찰 연락받고 온 거야. 아마 배성 그룹 쪽에서 누군가 신고했겠지.” 온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정신을 잃기 전 배승호를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사랑은 식었지만 위급한 순간에도 그가 떠오른 자신이 한심했다. “치료비는 내가 냈어. 정신적 손해배상으로 1000만 원도 네 계좌에 넣었어. 이번 일은 사적으로 끝내자, 어때?” 온채하는 원래도 이 일을 물고 늘어질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조재우에게 약간의 동정심도 들었다. 36살에 배성 그룹 관리직까지 올라 의욕이 넘쳤던 그가, 겨우 3년 만에 몸이 아닌 정신부터 늙어 버린 듯했다. 조재우의 아내는 이렇듯 한 번, 또 한 번 그의 직장을 망쳐 놓았을 것이다. 마치 뱀이 사냥감의 숨통을 조이듯 말이다. “대표님, 사모님은 괜찮아요?”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어. 경찰은 네가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어.” 휴대폰을 확인하니 정말 입금 내역이 있었다. 돈이 궁한 그녀에게 1000만 원은 큰돈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경찰서에 합의를 봤다고 말할게요. 사모님께도 저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전해주세요.” 조재우는 다시 머리를 싸쥐었다.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앞으로 그 여자를 보면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온채하는 머리에 붕대를 감았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1000만 원을 받은 것도 다행이라 여겨졌다. 저녁 무렵 퇴원한 온채하는 휴대폰으로 근처 월세방을 찾아봤다. 손에 있는 돈은 고작 1200만 원이라 아껴 써야 했다. 병원 앞에 서서 오늘은 호텔에서 묵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대의 차가 그녀의 앞에 멈췄다. 창문이 내려가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채하?” “오빠?”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배승호의 형, 배도윤이었다. 그는 그녀의 붕대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지만 그녀가 살짝 몸을 피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승호는 곁에 없어?” 배도윤은 다정했고, 온채하는 그를 신뢰했다. “오빠, 저 승호랑 이혼하려고 해요.” 그의 눈빛에 잠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지만 금세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일단 타. 머물 곳은 있어?” 온채하는 차에 타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사 근처에 방을 구하고 싶어요.” “인화로 근처? 거기에 내 집 하나 비어 있어. 그냥 거기 가서 살아.” “감사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돼요.” “뭘 그렇게 사양해? 나 집 많아.” 더 거절하면 괜히 예민해 보일 것 같아, 온채하는 눈가가 뜨거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도윤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창이 열린 채 멀리 큰 나무 아래에는 한 대의 차가 오래도록 서 있었다.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