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도서찬이 차를 몰고 별장으로 돌아가는 사이 핸드폰이 계속 울려댔다.
화면에 할머니라고 떠 있는 이름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벨 소리가 끊길 무렵 도서찬은 브레이크를 밟고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도서찬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다.
“내가 네 할미인 건 알긴 아네?”
조정숙의 기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연서 그 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서찬이 미간을 문지르며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
“연서가 좀 아파요. 나쁜 뜻은 전혀 없어요.”
“도서찬,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조정숙이 무섭게 호통쳤다.
“나쁜 뜻이 없다고? 네가 결혼한 걸 뻔히 알면서도 너한테 달라붙었어. 내가 살다 살다 저렇게 뻔뻔한 내연녀는 처음 봐. 당장 그 여자랑 정리하고 노을이를 달래줘.”
도서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머릿속에 황노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면서 짜증이 밀려왔다.
“노을이가 할머니한테 고자질이라도 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노을이가 우리한테 말할 필요나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인터넷에 온통 네 소식으로 도배됐는데. 도서찬, 내 말 명심해. 네 아내는 황노을이야. 어떻게 노을이가 바닥에 넘어진 걸 보고도 다른 여자 옆에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있어? 네가 이러면 남들이 노을이를 뭐라 생각하겠어? 옆에 파파라치도 그렇게나 많았는데.”
도서찬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눈빛에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이내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할머니. 인터넷에 올라온 소식을 보고 일부러 연서를 찾으러 병원에 온 거예요.”
“내가 얘기할게.”
도휘명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도서찬.”
핸드폰 너머로 도휘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노을이를 내 앞에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한 건 너야. 결혼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할아버지...”
“오늘 저녁에 본가에 와서 밥 먹어.”
도휘명은 도서찬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노을이도 꼭 데리고 오고.”
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서찬은 홀로 차 안에 앉아 왼손으로 핸들을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핸드폰에서 황노을의 연락처를 찾았다.
그가 전에 보낸 문자에 아직도 답장이 없자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꾹 참고 황노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황노을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뭐 해?”
도서찬이 차갑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황노을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도서찬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 병원에는 왜 왔어? 연서한테 따져 물으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황노을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지은이 만나러 간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
마음속에서 짜증이 다시금 치밀었고 도서찬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
핸드폰 너머에서 황노을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웃음소리에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명령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저녁에 같이 본가 가자.”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시간 없어요.”
황노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할아버지 명령이셔.”
도서찬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뚜뚜 하는 소리와 함께 황노을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서찬은 멈칫했다가 이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옆으로 차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고 도서찬은 한참 동안 말없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결국 핸드폰을 집어넣고 다시 시동을 걸어 그들의 신혼집인 별장을 향해 달려갔다.
하늘은 이미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서찬은 차를 세우고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황노을.”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현관의 불이 꺼져 있고 집 안 전체가 캄캄하다는 걸 알아챘다.
도서찬은 순간 멈칫했다. 예전이었더라면 황노을은 그를 위해 작은 불이라도 켜뒀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다 지쳐 거실 소파에서 잠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딸깍.
불을 켜고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소파는 텅 비어 있었고 황노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본가로 오라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났다면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딸깍...
그는 집 안의 불을 싹 다 켜고 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거실, 부엌, 화장실은 물론이고 몇 개의 침실과 서재에도 황노을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없나? 전화해도 받지 않고 대체 어디 간 거야? 이번에 가짜 이혼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데? 평소보다 심하게 삐졌어. 됐어. 어차피 알게 될 거야. 연서한테 6개월밖에 남지 않았고 내 와이프 자리는 계속 노을이 거라는 걸.’
황노을은 화가 나서 본가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도서찬은 가야 했다.
창고로 가서 건강 보조 식품 몇 개를 꺼냈다. 나오면서 잠깐 고민하다가 물건들을 내려놓고는 두 사람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 도서찬이 황노을에게 선물했던 샤넬 넘버 5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도서찬의 미간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는 옷을 몇 벌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옷으로 가득했던 커다란 옷장에 이젠 그의 옷만 남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커플 용품들도 하나씩 덩그러니 남았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단조로운 차가움만 감돌았다.
...
한편 뷰티 센터.
황노을과 임지은이 네일을 받고 있었다.
임지은은 황노을이 임산부용 네일을 특별히 골라 바르는 걸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 애를 지우겠다며? 그런데 임산부 전용을 골라?”
황노을이 웃어 보였다.
“고를 수 있다면 골라야지. 아직 뱃속에 있는데.”
임지은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반짝이는 네일아트를 보고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황노을도 손톱을 내려다봤다.
도서찬이 위가 좋지 않아 결혼 후 매일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주느라 네일을 받는 건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
임지은이 말을 이었다.
“네가 변하기만 한다면야 마음대로 해도 돼. 네일은 시작일 뿐이야. 나중에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옷 스타일도 바꿔. 나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우리 10살도 안 됐을 때 엄마 구두를 몰래 신고 돌아다녔잖아. 나이 들수록 더 꾸며야 해.”
임지은이 네일을 감상하면서 말했다.
“의사라서 화려하게 꾸미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워.”
황노을도 따라 웃었다.
그렇다. 그녀는 원래 튀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도서찬을 사랑하면서 그의 취향에 맞춰 자신을 바꿨을 뿐이었다.
한때는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서 그를 위해 요리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모든 건 다 허황된 꿈이었다.
다행히 아직 되돌릴 기회가 남았다. 황노을은 자신의 인생을 다시 올바른 궤도로 돌려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