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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다음 날. “사모님, 백유라 씨 이미 가셨고 대표님도 회사로 가셨어요. 안방 다 치웠는데... 다시 안방으로 옮기실 건가요?” 안정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고마워요, 아주머니.” 정해은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게스트룸에서 하룻밤 자 보니까 그 방이 채광이 더 좋더라고요. 내 물건을 전부 게스트룸으로 옮겨주세요.” 안정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대표님이랑 각방을 쓰겠단 말이야?’ “아 참.” 정해은은 두 걸음 가다 말고 다시 돌아섰다. “백유라가 썼던 물건들은 옮길 필요 없어요. 그냥 그 방에 둬요.” 다음에 또 쓸지도 모르니까. 사실은... 더러워서 싫었다. 안정숙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정해은을 쳐다봤다. 성씨 가문의 안주인인 정해은은 성격이 참 좋았다. 안정숙이 이 집에서 오래 일했지만 그녀가 가정부에게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참으로 상냥하고 다정하고 조용하게 빛났다. 게다가 얼굴도 예뻤고 말할 때도 거만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우아하고 고고한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재미없고 쉽게 질리는 사람이었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았다. 회사 일을 끝낸 성수혁이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거실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해은이가 불을 안 켜 놨나?’ 성씨 가문은 가정부들에게 까탈스럽게 굴지 않았다. 특히 정해은은 배려심이 아주 깊었다. 저녁때가 지나면 가정부들은 기다릴 필요 없이 모두 쉬러 가도 되었다. 평소 이 시간이면 정해은은 담요를 덮고 소파에 앉아 책이나 따뜻한 차를 들고 성수혁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오늘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성수혁의 두 눈이 당황함이 스쳤다. 외투를 벗어 스스로 거실 불을 켠 다음 1층을 둘러봤으나 가녀린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벌써 자러 들어갔나?’ 성수혁이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때 밖에서 천둥이 치면서 번개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가르더니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졌다. 오랜만에 찾아온 폭우였다. 성수혁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어쩐지 집으로 오는 길에 날씨가 숨 막힐 정도로 습하더라니. 그건 폭풍우가 내리기 전의 고요함이었다. 오늘따라 그 고요함이 유난히 싫어 운전기사에게 액셀을 더 밟으라고 재촉했었다. 폭우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창밖을 내다보던 성수혁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해은이 아직도 화났나?’ 그 생각에 급히 위층으로 올라가 안방 문을 열었다. “해은아, 나 왔...” 그런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성수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정해은이 방에 없었던 것이었다. 문득 뭔가 떠올라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왜 그래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정해은이었다. 성수혁이 말하기도 전에 정해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게스트룸에서 자 봤는데 낮엔 햇빛이 잘 들고 밤엔 발코니에서 별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거기서 자려고요.” 성수혁은 잠깐 침묵하다가 차갑게 대꾸했다. “마음대로 해. 그럼.” 그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정해은은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 ‘아직도 뭘 바라고 있는 거야?’ 성수혁의 양보와 다정함은 이제 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그녀가 아니었다. 방금 그 행동은 화가 났다는 뜻인 게 분명했다. 아마 일부러 억지를 부리려고 각방을 쓰려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식탁 앞. “유라가 새 작품에 들어갔는데 장르가 공포야. 무서워해서 요 며칠은 집에 안 들어올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성수혁이 우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정해은이 토스트에 치즈를 천천히 바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 “촬영장에 같이 있어 줄 거예요? 그럼 회사 일은?” 떠날 생각이긴 했지만 성씨 가문이 그동안 그녀에게 잘해줬기에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몇 년 전 정씨 가문이 부도 위기에 처했을 때 성씨 가문이 돈과 힘을 써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건물을 다시 세웠다. 성씨 가문은 성창수의 평생 심혈이라 점점 더 잘되길 바랐다. 하지만 성수혁은 정해은이 또 질투한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유라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연예계가 얼마나 험한 바닥인데. 내가 옆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어. 이번에 들어간 작품이 특히 여자애들이 무서워하는 스릴러야. 당연히 옆에 있어 줘야지.” 정해은이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가슴이 저리고 시큰거렸지만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가지 말란 소리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오버해요?” 너무도 덤덤한 태도에 성수혁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예전이었더라면 진작 화내고도 남았을 텐데. 정해은은 남들 앞에선 항상 상냥하고 사리 분별을 잘했다. 하지만 성수혁의 앞에서는 울면서 무너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조용했다. 따져 묻지도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성수혁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마침 나도 요 며칠 바쁠 것 같아요. 친정에 다녀올 생각이거든요.” 배부르게 먹었는지 우아하게 입가를 닦고를 고개를 들어 다정하게 웃었다. 성수혁이 입술을 적셨다. 마음을 덮쳤던 불안이 마침내 사라졌다. “해은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돌아와서 생일 다시 챙겨줄게.” 결혼기념일이자 그녀의 생일이었던 며칠 전 그날이 백유라 때문에 엉망이 돼버렸다. 그날은 정해은의 가슴속에 가시처럼 박혀 뽑아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그 말에 정해은은 고분고분 고개만 끄덕일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착하고 이해심 많은 모습에 성수혁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오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이마에 입 맞추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해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바람에 키스가 허공에 떨어졌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정해은은 가슴이 떨렸다. 성수혁이 그녀에게 이렇게 웃어 보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예전엔 자주 이렇게 웃어줬지만 실종 2년 만에 돌아온 뒤로는 본 적이 없었다. 웃어도 백유라에게만 웃어 보였다. 과거 성수혁은 정해은을 진심으로 아꼈었다. 신혼 초 두 사람도 여느 커플 못지않게 사랑이 깊었다. 성수혁은 평생 그녀만 사랑하고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만약 어기면 다시는 사랑 같은 건 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정해은이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하자 바로 정관수술을 했다. 그때는 진심이 느껴졌기에 성수혁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진심은 아쉽게도 한순간에 변했다. 아마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백유라와 함께한 2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줬다. 기억을 잃은 성수혁은 사실 돌아오길 거부했다. 그곳에 백유라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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