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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성씨 가문 본가. “해은아, 이리 와. 할아버지 좀 보자. 아이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석 달 사이에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 성창수는 정해은을 보자마자 지팡이를 짚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눈빛에 걱정이 가득 어려 있었다. 6개월 동안 정해은의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위장은 감정과 직결되는 장기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식욕도 자연스레 억제된다. 성수혁이 실종된 2년 동안 정해은은 과도한 그리움과 걱정, 두려움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결국 위병이 생겼다. 과거 정해은은 몸이 아주 건강했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여도 어릴 땐 체육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성수혁이 실종되면서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때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바람에 위병을 얻고 말았다. 그리고 성수혁이 돌아온 뒤에는 백유라를 데려왔다. 결혼 생활에서 안정감을 잃어 불안해진 정해은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10대 소녀가 아니었다. 이렇게 몸을 혹사했는데 어찌 쇠약해지지 않겠는가? 성창수는 손주며느리를 늘 예뻐했다. 홀쭉해진 정해은을 보자마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지더니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자, 앉아. 해은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다들 먼저 나가 있어.” 성창수가 손을 흔들었다. 집사는 하고 싶은 얘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그냥 나가버렸다. 정해은은 마음이 세심한 사람이었다. 거실 구석에 놓인 휠체어에 시선이 머무른 순간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성창수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할아버님, 요즘 몸은 좀 어떠세요?” “아이고, 괜찮아.” 성창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계속 그렇지, 뭐. 걱정해줘서 고마워. 역시 우리 해은이가 최고야. 수혁이 그 녀석은 이 늙은이를 전혀 신경도 안 써.” 성수혁의 얘기에 정해은은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무언가에 짓눌린 듯 숨이 막혔다. 물에 빠진 사람이 죽기 직전의 고통이랄까? “해은아, 할아버지한테 말해봐. 그 녀석이 널 괴롭힌 거지?” 정해은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할아버지에게 고자질할 생각이 없었던 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수혁 씨 저한테 잘해줘요.” “거짓말하지 마.” 성창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해은이 네가 어떤 애인지 내가 모를 리가 있어? 어릴 때부터 착해빠져서 절대 싸우거나 뺏으려 하지 않잖아. 이런 성격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혼자 가슴에 쌓아두고 누가 묻지 않으면 말도 안 하고 물어도 숨기기 일쑤지.”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꽃을 가꾸듯 소중하게 대하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 네 모습을 봐봐. 얼마나 초췌한지. 꽃잎이 거의 다 떨어질 지경이야. 내가 회사 일에 손을 떼긴 해도 눈은 멀쩡해. 밖에서 떠도는 소문들 할아버지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성창수가 정해은의 손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는 항상 네 편이야. 네 억울함을 꼭 풀어줄게. 수혁이 녀석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정해은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미 사인한 이혼 합의서가 떠올라 시선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할아버님. 하지만 괜찮아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백유라를 향한 성수혁의 마음은 누가 봐도 사랑인데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가 백유라를 바라보는 눈빛은 예전에 정해은을 바라보던 그때와 똑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은 뜨겁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고 사람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감정에 더 얽매이게 되면 둘 사이의 정만 다 닳아 없어질 뿐이다. 죽마고우는 결국 새로운 사랑을 이기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해은은 마음속에 씁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우리 착한 해은이.” 정해은의 모습에 어렴풋이 짐작이 간 성창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수혁이가 너한테 잘못한 거 맞지? 할아버지가 나서줄게. 내일... 아니, 오늘 저녁에 당장 그 녀석을 불러서 혼쭐을 내줄게. 너희는 부부인 데다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정이 있어. 부부끼리 싸우는 건 흔한 일이야.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디 있어? 서로 솔직하게 털어놓고 얘기하면 돼. 그리고 그 백유라라는 애는 멀리 해외로 보내버릴 생각이야.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줄게. 응?” 정해은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님, 이건 저랑 수혁 씨 사이의 일이에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할아버님은 가만히 지켜보시기만 하면 돼요...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건강을 챙기는 게 우선이에요.” 평생 힘들게 일만 해온 성창수는 나이가 든 후 여러 가지 병에 시달렸다. 그러니 어찌 아랫사람들의 일까지 신경 쓰게 하겠는가? 게다가 성창수가 정말 백유라에게 손을 쓴다면 그의 성격상 크게 화를 낼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성창수와 성수혁의 사이에 틈이 생길 것이다. 정해은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성창수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수십 년간 상계를 휩쓴 인물답게 성창수의 예리함은 보통 사람을 훨씬 넘어섰다. 게다가 정해은을 어릴 적부터 봐왔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한참 뒤 고요한 공기 속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성창수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해은아, 솔직하게 말해봐. 너 수혁이랑 이혼하려는 거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정해은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꼼작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성창수가 이렇게 정확히 짚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해은은 원래 그녀만의 계획이 있었다. 성창수가 심장병이 있는 데다가 나이도 많아 자극을 받으면 안 되었다. 하여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당분간은 성창수에게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명절이 되면 핑계를 대거나 성수혁과 함께 할아버지 앞에서 연기하면 되었다. 그리고 언론 쪽은 성수혁이 알아서 막아줄 테니 성창수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았는데 성창수가 먼저 알아채고 말았다. 숨기려던 일을 숨기지 못했고 얻으려던 감정도 얻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은 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성창수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리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은아, 수혁이랑 이혼하지 말아줘. 응?” 정해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을 늘어뜨린 채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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