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무열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신재는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그 전에 지금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강청연은 하인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물러가고 무 군관을 모셔 오거라.”
“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늦게 행동하면 목이 날아갈까 봐 두려워 민 내관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서재를 벗어났다. 세자의 성격이 어떤지 그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무열은 청이한테 물었다.
“고작 환관의 말을 정말 믿을 수 있겠느냐?”
청이는 얼른 눈치껏 대답했다.
“저하, 김신재는 확실히 글을 읽고 독서하기를 즐기옵니다. 매번 서재를 청소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몰래 책을 찾아보려고 그런 것이고 5일 전에도 저한테 절묘한 시가 생각났다며 과시한 적 있사옵니다.”
“감히 날 속인다면 너한테도 처벌을 내릴 것이다!”
이무열은 으름장을 놓았다.
“네!”
청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속으로 김신재가 허풍을 친 게 아니길 바랐다.
곧 우림군관 이무령이 서재로 들어왔다. 올해 20살 나이인 이무령은 흰색 갑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허리춤에는 환수도를 찬 채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또한 덕헌국에서 유명한 미모의 여장군이기도 했다.
이무령의 관직은 경기 근위군 8대 군관 중 한 명으로 정예 기마 우림군을 거느리고 있다.
출신은 왕실 직계 북연 군주로 주상의 친조카이자 세자의 사촌 여동생으로 동궁을 지지하는 두 번째 세력이기도 하다.
“오라버니, 왜 저를 찾으시는 겁니까? 저는 시를 지을 줄 모릅니다.”
이무령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펴 보였다.
“무령아, 가서 김신재를 데려오너라.”
“김신재라면 오늘 처형할 그 환관 말입니까?”
이무령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자가 맞다. 청이가 말하기를 그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관한 시를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오라버니,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닌지요? 환관 따위가 치국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게다가 시를 짓는다니요? 분명 죽지 않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세자빈 강청연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군주마마,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듣자 하니 김신재는 초나라 출신인데 그곳은 남부 수향 지역으로 한때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합니다. 한번 불러서 확인해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무열도 고개를 끄덕이며 강청연의 말에 맞장구쳤다.
“맞는 말이다. 서 총관이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바마마가 크게 노하실 때까지 지체할 수는 없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만약 헛소리하는 거면 즉시 끌고 나가서 목을 베어버릴 겁니다.”
이무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
김신재는 나뭇간에서 숯으로 벽에 시의 첫 구절을 썼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농원 다스리듯 해야 할지어다.]
펑!
이무령은 나무문을 발로 걷어차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와 붉은 망토 위의 눈을 털어내며 김신재에게 말했다.
“청이가 그러길 네가 시와 가부를 좀 안다지? 거기다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 좀 안다던데 사실이냐?”
김신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조금 알고 있을 뿐입니다. 대대손손 강릉 선비 집안이어서 세 살 때부터 아버지께서 몰래 독서와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집안 자식이 어찌 궁에 들어와서 환관이 되었단 말이냐?”
이무령은 여전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덕헌국에서 무예만 중시하고 문학을 경시하여 수십 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책을 불태우고 유교 사상을 억압하면서 학자들의 살길을 끊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무엄하다! 환관 주제에 어디 감히 덕헌국 국정을 함부로 논하는 것이냐?”
이무령은 환수도를 뽑아 김신재의 뒤통수에 겨누고 살기를 표출했다.
김신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뒤돌아 눈앞의 아름다운 여장군을 똑바로 보며 답했다.
“군주마마, 소인이 조금 전에 시의 첫 마디를 썼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무령은 벽에 유려하게 쓰인 숯 글씨를 보고 크게 놀랐다.
“이건... 네가 쓴 것이냐?”
김신재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덕헌국에 이렇게 유려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이곳으로 타임슬립하기 전 그는 교육 수준이 꽤 높은 집안에서 자랐으며 가족들은 모두 학교 선생님이었고 가르치는 분야도 다양했었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붓글씨를 연습하게 했기에 유명한 서예가 황희지부터 대문호 소식까지 그들의 글을 몇 번이나 모사했는지 모른다.
“남자도 아닌 환관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다고 큰소리냐?”
“군주마마께서도 북연에서 어릴 적부터 글을 깨쳤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소인의 시를 해석해 보시겠습니까?”
김신재가 웃으며 질문하자 이무령의 아름다운 얼굴이 한순간에 빨개졌다.
북연왕은 확실히 그녀에게 어릴 적부터 독서와 글을 배우라고 강요했지만 이무령은 그런 쪽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칼과 창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덕헌국 왕실의 전투 혈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음...”
이무령은 필획이 많은 글에서 머리가 하얘져 ‘농’자를 가리키며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무슨 글이냐?”
“농원 농자도 모르시는 겁니까?”
김신재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으며 이무령은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계속 무례하게 굴면 네놈의 목을 칠 것이다.”
“농원, 채소밭이라는 뜻입니다.”
아직 이 시대에는 유행하지 않은 시의 형식이었기에 이무령은 묵묵히 몇 번을 더 읽어보더니 꽤 재미있는 시라고 생각했다.
비록 한 마디지만 운율이 있고 입에 잘 붙어 문맹이라도 쉽게 읊조릴 수 있는 시조였다.
“한 마디뿐인 것이냐? 더 없느냐?”
이무령이 급한 마음에 질문하자 김신재는 오히려 들고 있던 숯을 버리고 손을 탁탁 털면서 대답했다.
“세 마디 더 있는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고 세자 저하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분명 다시 주상 전하의 신임도 없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얼른 써 내려가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이무령이 재촉하자 김신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소인이 뒷부분까지 다 쓰면 분명 지금 이 자리에서 소인의 목을 치시겠지요. 하여 소인도 조건이 있습니다.”
“하인 신분에 어디 감히 본 군주한테 조건을 운운하는 것이냐?”
이무령가 목에 환수도를 들이댔지만 김신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첫째, 세자 저하께서 소인을 죽이지 않는다고 약조해 주셔야 합니다. 둘째는 소인을 동궁 내관으로 임명한 뒤 스승으로 모시면서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소인은 세자 저하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좌할 것이며 덕헌국을 다스리는 데 힘을 보태어 나라를 더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백성들이 추대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무령은 크게 화를 내며 칼을 들어 내리치다가 김신재의 목 살갗에 닿자 다시 멈추었다.
“세자 저하를 겁박하는 건 9족을 멸할 죄라는 걸 알고 있느냐?.”
“죄송합니다만 소인이 가문의 마지막 세대라 멸할 9족이 없지 말입니다.”
김신재는 담담하게 웃었다.
“너...”
자신이 눈앞의 작은 환관한테 농락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무령은 예쁜 두 눈을 살벌하게 뜬 채 김신재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화를 억누르고 서둘러 돌아가 이무열에게 보고했다.
이무열은 이무령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노했다.
“하찮은 하인 따위가 감히 본 세자와 조건을 따져? 스승으로 모시고 존중하라고? 그럴 자격도 없는 놈이! 당장 끌고 나가서 목을 쳐라!”
“네!”
“잠시만요!”
세자빈 강청연이 이무령을 붙잡고 물었다.
“시의 첫 마디가 무엇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농원 다스리듯 해야 할지어다.”
이무령은 아무 생각 없이 김신재가 썼던 시를 읊었다. 그녀도 좋은 시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디가 좋은지는 알지 못했다.
강청연은 어릴 적부터 덕헌국 왕후에 대한 요구에 따라 가르침을 받았기에 가야금, 바둑, 서예 그리고 그림까지 어느 정도 다 깨우치고 있었다. 강청연은 방금 이무령이 읊은 시를 몇 번 다시 조용히 읊어보더니 매우 흥분한 기색으로 이무열에게 말했다.
“저하, 이 시는 구성이 정연하고 쉽게 기억되는 데다가 의미도 깊은 것으로 보아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핵심도 치국책에 관한 것으로 아바마마께서 요구하신 과제에 부합됩니다.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부인,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이무열은 믿기 어려웠다.
“먼저 약조하시고 만약 뒷부분도 이처럼 놀라운 수준이라면 옆에 남겨서 저하의 사람으로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매달 과제를 내주시지 않으십니까?”
강청연과 이무령 외에 그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어야 했기에 이무열은 강청연의 제안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남자한테 치욕스러운 비밀을 일개 하인이 알고 있다는 건 매우 망신스러운 일이다.
이무령도 강청연의 말에 동의했다.
“오라버니, 세자빈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먼저 옆에 남겨두십시오. 어차피 저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지 않습니까? 김신재 그놈은 똑똑한 놈이어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 한낱 환관일 뿐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이무열은 어쩔 수 없이 승낙하면서 김신재도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창피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