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황당한 건 서예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애 없이 초고속으로 결혼한 터라 감정 기반이 튼튼하지 않을까 봐 일부러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서예은은 속으로 은근히 좋아했다. 이내 박시우에게 말했다. “뭐 나쁘진 않네요.” 박시우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했기에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때, 서예은은 산부인과 병동 쪽으로 급히 걸어가는 낯익은 실루엣을 보았다. 다름 아닌 디자인 부서 허안나였다. “왜? 뭐 봤어?” 박시우가 물었다. 그는 내내 서예은에게 신경을 쏟아부었기에 무엇을 봤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순식간에 진지해진 그녀의 시선을 금세 알아차렸다. 서예은은 고개를 저었다. 남의 일에 굳이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그래.”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또 다른 익숙한 그림자가 급히 산부인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허안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서예은은 박시우의 팔을 끌어당겨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병원에서조차 몰래 숨어다니는 신세라니. 박시우는 어이없다는 듯 서예은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도둑처럼 구는 걸까. “됐어, 그냥 가자.” 서예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숨었는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당사자들보다 본인이 더 긴장하다니. 두 사람은 병원 주변을 한 바퀴 더 돌고서야 병실로 돌아왔다. 이금희와 정미정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이때, 정미정이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다음에 또 뵈러 올게요.” 이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헤어질 때 아쉬움이 묻어났다. 서예은은 병실에 남아 계속 외할머니 곁을 지켰다. 그러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할머니, 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하셨어요?” 사실 금방 할 말이 떨어져 어색한 침묵만 흐를 줄 알았다. 이금희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다, 기억은 안 나는데 그냥 이런저런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