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탁!
할머니는 젓가락을 젓가락 받침에 세게 내려놓고 윤시혁을 올려다보며 엄포를 놓았다.
“당장 앉거라! 오늘엔 어디도 못 간다! 너랑 수아는 오늘 밤 본가에서 자고 가거라!”
윤시혁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완강한 태도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병환이 도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할머니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밥 먹자.”
그렇게 사람들은 계속해서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분위기는 다소 침울하고 답답해졌다.
식사를 마친 임수아는 할머니를 모시고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소화를 도왔고 윤시혁과 윤정후는 2층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들어선 윤시혁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형부, 언제 오세요? 언니가 너무 아파서 계속 울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애교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 윤시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채 바꿔줘.”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서은채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혁아...”
“은채야. 미안해. 지금 당장 갈 수가 없어.”
윤시혁의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고 미안함이 묻어났다.
그 말을 듣자 전화기 너머의 서은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난 괜찮아. 그럼 방해 안 할게. 나... 꺄악!!”
서은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전화가 뚝 끊겼다.
“은채야! 여보세요??”
윤시혁은 다급하게 외쳤다.
“형, 무슨 일이야? 은채 누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윤정후가 다급하게 물었다.
윤시혁은 아무 대답 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서은채도, 그녀의 여동생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시혁은 전화를 끊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고 결심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
정원에서 임수아의 휴대폰 카톡 알림이 울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할머니를 부축하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윤시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2층 서재에서 기다릴게.]
임수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답장하지 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할머니를 부축하며 계속 걸어갔다.
‘신경 쓰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상관하지 말자.’
속으로는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마음은 자꾸만 그를 향해 맴돌았다.
결국, 임수아는 얼마 못 가 핑계를 대고 할머니를 모시고 집안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윤시혁을 찾았다.
서재 문을 열고 그를 마주한 임수아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았어요?”
윤시혁은 망설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난 반드시 은채를 만나러 가야 해.”
잠시 멈춘 후, 그는 말을 이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임수아의 마음이 쿡쿡 쑤시는 듯했다.
역시 서은채 때문이었다.
이미 어렴풋한 짐작이 있었지만 직접 듣기 전까지는 그래도 약간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까지 하다니.
그는 정말 그녀의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단 말인가.
임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윤시혁을 바라봤다.
윤시혁은 그녀의 침묵을 거래를 위한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보수는 2억으로 할게!”
임수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약간의 슬픔이 묻어 있었다.
“허허... 역시 윤 대표님은 스케일부터 다르네요! 이렇게 후하게 주시는데 내가 어찌 거절하겠어요. 걱정 말아요. 어떻게든 당신을 밖으로 내보내 줄 테니까. 반드시 그 소원을 이루어줄게요!”
그렇게 말하는 임수아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는 정말 너무 잔인했다.
그 말을 듣자 윤시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입을 열었다.
“이유는 내가 생각해 놨어. 네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우리가 가봐야 한다고 말하면 돼.”
임수아는 목구멍에 솜이 뭉쳐있는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시혁은 그 자리에서 임수아의 계좌로 2억을 송금했다.
통장에 찍힌 2억을 바라보며 임수아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니... 그러나 지금처럼 고통스러운 돈벌이는 처음이었다.
“역시 윤 대표님답네요. 가시죠.”
차갑게 미소 지으며 임수아는 서재를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임수아는 소파로 가서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 아빠한테 전화 왔는데 집에 좀 일이 생겨서 저랑 시혁 씨랑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임수아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윤시혁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더니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가 봐. 가는 길 조심하고.”
“네.”
임수아는 윤시혁의 차를 타고 나갔다.
윤시혁은 차를 쏜살같이 몰았다.
시내에 진입하자마자 그는 차를 세우더니 임수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려.”
임수아는 잠시 굳었지만 아무 말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차는 이미 멀어져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임수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택시를 잡았다.
마침 지나가던 택시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차에 올라타 목적지를 말한 후, 그녀는 뒷좌석에 몸을 기대앉았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육체적인 고통만큼 마음도 지쳐 있었다.
차 안에서 감도는 은은한 향기는 맡을수록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후, 임수아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여기서 내려주세요.”
임수아가 말했다.
“아가씨, 아직 다 안 왔는데요.”
기사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여기서 세워주시면 돼요.”
임수아가 말했다.
이번에 기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속도를 더 높였다.
그 모습을 본 임수아는 얼굴색이 변하며 바로 소리쳤다.
“차 세워!”
‘제기랄!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택시를 잡아도 하필 불법 택시를 잡다니!’
차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임수아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즉시 몸을 움직여 운전석 뒷자리로 옮겨 팔을 뻗어 뒤에서 기사의 목을 조르고 있는 힘껏 그를 압박하며 위협했다.
“당장 세워!”
갑작스러운 공격에 기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숨통이 조여 오는 고통에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그는 이 여자가 이런 반항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힘까지 이렇게 세다니.
그의 얼굴에 잔혹한 기색이 스치더니 거칠게 핸들을 꺾었다.
쾅!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중심을 잃은 임수아는 그대로 왼쪽 차 문에 부딪혔다.
엄청난 충격에 임수아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