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문지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대답 대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쿵 하고 울리는 소리에 소유나는 오히려 웃음기를 한층 더 띠고,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집이 크면 클수록 적막도 깊다.
소유나는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원래도 낯선 침대에서는 쉽게 뒤척이는 편이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자 보지 못한 번호가 화면에 떠올랐다.
밤 12시. 이 시간에 아는 사람이 전화를 걸 일은 거의 없다.
신호는 집요하게 계속 울렸다. 결국 그녀는 받았다.
“유나야... 나 너 좀 보고 싶어.”
낯선 번호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하준명의 힘 빠진 청이 들렸다.
“병원에 와 줄 수 있어?”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소유나는 그가 두들겨 맞던 영상을 떠올렸다. 아직도 입원 중이라니 상태가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전화를 끊기 직전 생각을 바꿨다.
“어느 병원인데?”
...
새벽 한 시의 병원은 낮보다 훨씬 조용해, 세상에 병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을 준다.
소유나는 VIP 병동을 찾았다. 호텔 스위트 같은 호사스러운 공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준명은 환자복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온통 시퍼렇고 붉은 데다가 팔과 다리에는 석고가 감겨 있었다.
“유나야.”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일어나려 했지만, 허리에 고정 벨트를 매고 있어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내는 몸을 다시 눕혔다.
“너 안 올 줄 알았는데.”
억지로 웃는 하준명 위로 소유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문지후가 꽤 세게 손을 쓴 듯했다.
“괜찮아?”
그녀가 물었다.
하준명은 석고 한 손발을 보고는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안 괜찮아.”
“누가 그랬는데?”
“몰라.”
말이 나오자마자 그의 눈이 험악해졌다.
“잡히기만 하면 죽여 버릴 거야!”
소유나는 심장이 덜컹했으나 담담히 말했다.
“세상에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아주 많아. 네가 좀 자중해. 괜히 더 크게 당하지 말고.”
그가 한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가 무언가 눈치챘나 싶었지만 하준명은 다른 말을 꺼냈다.
“너 아직도 나를 걱정해 주는구나.”
그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역시 너 아직 나를 사랑해.”
소유나는 입을 열다 욕을 삼켰다.
“나 결혼했어.”
“네가 그 남자를 사랑할 리 없지.”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 2년이나 만났어. 네가 그렇게 빨리 마음이 바뀔 리가 없어. 유나야, 이혼해. 내가 너를 데려갈게.”
소유나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 너 안 좋아해.”
“말도 안 돼. 네가 나를 위해서 일부러 직장까지 옮겼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
그는 흥분했다.
“맹세할게. 다시는 배신 안 해.”
소유나는 맹세 따위는 믿지 않았다. 이미 배신한 사람의 약속이라면 더더욱...
“남편이랑 결혼 생활을 배신할 생각 없어.”
그가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더는 시간 낭비하기 싫었다.
석고 친 손과 다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훑어보고서는 말했다.
“푹 쉬어.”
“유나야...”
소유나는 문을 닫아서 그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밖으로 나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런 인간은 차라리 평생 못 일어나는 편이 세상 평화로울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
집을 나서서 다시 현관 앞에 서기까지 한 시간 남짓.
그녀는 문지후를 깨우지 않으려 최대한 조심했다. 암호 키패드를 누를 때마다 삑 소리가 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음 설정 좀 되면 안 되나?’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을 열었다. 깊은 밤의 고요 속에서는 작은 소리도 천둥 같았다.
신발을 벗고 안도하려던 찰나 불이 번쩍 켜졌다. 몸이 얼어붙었다. 도둑질하다가 집주인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두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안은 얼음으로 봉인된 듯 싸늘했다.
소유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문지후가 냉랭한 얼굴로 서 있었다. 깊은 눈동자에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했고,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소유나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깨어 있었네요, 지후 씨.”
“설명해.”
문지후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소유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람 좀 쐬고 왔어요.”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못 믿겠다는 글씨가 얼굴에 쓰인 듯했다.
“사실 병원에 다녀왔어.”
결국 그녀가 털어놓았다.
“전 남자친구를 만났군.”
문지후의 시선이 짙게 가라앉았다.
소유나는 그의 말이 영 못마땅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니 묘하게 애매한 뉘앙스까지 감돌았다.
“나는 그 사람이 지후 씨가 했다는 걸 아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문지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래서?”
“몰랐어요. 그래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예요.”
문지후는 코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
하준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소유나는 그가 조금 거만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일단 충고했다.
“하준명 별로 좋은 사람 아니에요. 지후 씨도 조심해요.”
문지후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부엌으로 가 물을 따랐다.
“왜 그 사람한테 내가 했다고 말하지 않았어?”
“제가 왜요?”
그녀에게 그럴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하준명을 직접 혼내 줬을 것이다.
문지후는 물을 마시며 시선을 가늘게 좁혔다.
“그 사람은 네 전 남자친구잖아.”
“지후 씨는 내 남편이에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소유나는 스스로도 놀라 두 눈이 반짝였다. 문지후 역시 물컵을 든 채 그 말만 맴도는 듯했다.
“지후 씨.”
그가 고개를 돌리자, 소유나는 바를 사이에 두고 살며시 웃었다.
“지금 내 마음속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후 씨예요. 그러니까 내 마음 의심하지 마요.”
문지후는 컵을 내려놓고 건조하게 말했다.
“또 이상하게 구네.”
그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소유나는 용기를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문지후가 찡그렸다.
“나 지후 씨 정말 좋아해요.”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문지후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 속에 잔잔한 웃음이 어리는 듯 진심이 비쳤다.
“얼마나?”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낮게 물었다.
소유나는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지후 씨 아이를 낳고 싶을 정도로요.”
만약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아이를 남겨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떠난 뒤 자신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살면 될 터였다.
문지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대담한 생각이었다.
“혹시 임신이라도 했어? 책임져 줄 사람 찾는 건가?”
그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내려갔다.
“네?”
그 엉뚱한 추측에 소유나는 얼떨떨했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돼서 아무 남자나 붙잡고 결혼했다... 뭐 그런 시나리오야?”
문지후는 드물게 길게 말하며 그녀의 의문에 답을 주었다.
소유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고, 문지후는 한발 물러서며 얼굴을 더욱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