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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문지후는 소유나가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토록 대담했는지 이제야 납득했다. 그때 그가 밀어내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그녀의 뜻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아니에요!” 소유나는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지후 씨,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내가 언제 임신했다고 그래요?” 문지후는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그럼 왜 내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어?”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지후 씨가 싫다면 안 낳으면 되죠.” “그래, 나는 싫어.”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소유나는 다시 설명했다. “나 임신 안 했어요. 그리고 하준명이랑은 그런 관계까지 간 적도 없었어요.” “그 일은 나랑 상관없고.” 문지후는 길게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이를 낳고 싶으면 말해. 다른 남자랑 아이를 갖는 것도 막지 않아. 다만 이혼하지 않은 채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면 그때는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가벼운 어조였지만, 소유나는 그날 밤 처리하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고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그럴 일 없어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문지후는 허리를 곧게 펴고 벽에 기대섰다. 그의 깊은 눈빛은 끝을 알 수 없는 위험한 심연 같아서, 소유나를 끌어당길 듯 매섭게 꽂혔다. “결혼하자고 한 것도 너고, 이혼 못 하겠다고 버티는 것도 너야.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대로 버티고 있어 봐.” ... 술은 몸에 해롭다며 멀리하던 소유나였지만, 가끔 술은 마음을 다잡게 했다. “진짜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입만 그런 거야?” 출장에서 막 돌아온 유연서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바에 들렀다. 하준명의 바람을 들켰을 때와는 또 다른, 묘한 슬픔이 소유나의 눈에 서려 있었다. 소유나는 긴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나 지후 씨랑 예전에 만난 적 있어.” “언제?” 유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되게 오래됐어.” 소유나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아빠가 바람피운 걸 엄마가 알고 충격받았던 해였어. 다리 위에서 차 세우고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내가 붙잡아도 못 막았거든. 그때 지나가던 지후 씨가 엄마를 끌어당겨 줬어. 안타깝게도 엄마는 그걸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소유나는 웃었지만 눈가가 금방 물기를 머금었다. 유연서는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소유나는 억지로 웃고 한 모금 삼켰다. “지후 씨는 아마 기억 못 할 거야. 나도 네가 지후 씨 이름을 말한 다음에야 떠올랐거든. 그때 떠나기 전, 차에 있던 여자가 지후 씨 이름을 부른 적 있어.” 이건 유연서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집간 거야?” “응.” 소유나는 잔을 쥔 채 낮게 말했다. “문지후 병이 오진이었으면 좋겠어. 아프지만 않다면 좋아하는 사람도 떠나지 않을 텐데.” 둘은 말을 멈추고 술을 비웠다. 바의 소음도 두 사람이 가라앉은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정말 문지후 아이를 낳아 주고 싶어?” 소유나는 웃었다. “지후 씨는 필요 없대.” “만약 필요하다면?” “그럼 낳을 거야.” 유연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유나는 술을 더 따라 마시며 중얼거렸다. “죽는다는 말을 듣는 데 너무 불안해. 지후 씨가 죽는 건 싫어.” 유연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문지후는 그녀 어머니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은 각자 운명이야.” 유연서가 탄식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소유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뭔가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결국 결혼도 그의 말년을 지켜 주겠다는 자신의 일방적인 각오만 있을 뿐이다. 정작 문지후는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연서는 술잔을 채워 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네가 네 삶을 지키면 돼.” “응.” 소유나는 그저 조금 슬펐다. 문지후는 아직 한창 젊은데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니 마음이 먹먹했다. 술잔을 비우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랐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유연서는 술을 제법 마셔도 멀쩡해서 비틀거리는 소유나를 부축해 바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문지후의 집 앞에 도착했다. 유연서가 초인종을 두 번 누르자 그제야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을 보고는 유연서가 잠깐 말을 잃었다. 소유나 말대로 정말 잘생겨서 여자라면 쉽게 마음이 갈 만했다. “댁 와이프는 여기까지 데려다줄게요.” 유연서는 소유나를 그대로 문지후의 품에 밀어 넣었다. 말보다 몸이 빠른 문지후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받아 안았다. 문틈 사이로 풍긴 술 냄새가 지금은 한층 짙었다. 소유나는 그의 품에 기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유연서는 한 번 더 당부했다. “저는 갈게요. 유나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술 취해서 그래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문지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서는 손을 휙 흔들고는 돌아섰다. 문지후는 품에 안긴 소유나의 가느다란 몸을 지탱한 채 문을 닫았다. 희미한 술 냄새에 은근한 향이 섞여 그의 숨결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힘없이 기댄 채 눈도 뜨지 못했고,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흔들렸다. 여자가 우는 이유는 남자 때문이거나,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녀는 잘살고 있으니 남자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큰 셈이었다. 2년을 만난 남자가 눈앞에서 바람을 피웠으니 마음이 편할 리도 없었다. “지후 씨...” 그녀가 중얼거렸다. 문지후는 그녀가 깬 줄 알고 내려다봤지만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술김에 투정을 부리려는 건가 싶던 찰나... “죽지 마.” 그 한마디에 문지후의 손끝이 굳었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와 그의 셔츠에 스며들었다. ...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유나는 침대에서 뒤척이다 겨우 눈을 떴다. 잠옷이 바뀐 걸 깨닫고는 곧장 유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네가 내 옷 갈아입힌 거야?” “무슨 소리야? 난 너 지후 씨한테 맡기고 바로 갔어.” “...” “지후 씨가 옷 갈아입혀 줬어?” 유연서의 목소리가 단숨에 들떴다. “혹시 같이 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소유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네가 술 취해서 들러붙은 건 아니고?” “안 그랬거든.” 소유나는 친구의 농담에 할 말을 잃었다. 아마 문지후도 어젯밤 그녀를 받아 줄 때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엉뚱한 짓을 했다면 지금처럼 침대에서 멀쩡히 눈뜨지는 못했을 것이다. 방에서 나오니 창문으로 쏟아진 햇살이 따스하고 눈부셨다. 금빛 가루가 흩날리는 듯한 거실 한가운데 문지후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실루엣이 어쩐지 아득해서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소유나는 숨소리까지 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숨소리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죽였다. 문지후가 시선을 들어 정확히 그녀를 포착했다. 시선이 맞닿자, 소유나는 살짝 입술을 적시고 미소 지었다. “지후 씨, 어젯밤... 고마웠어요.” “다음에는 이런 일 없었으면 해.” 문지후는 짧게 답하고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소유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물 한 잔을 따랐다. 길고 고운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리듬을 감상하다가는 슬쩍 물었다. “어젯밤,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죠?” 문지후의 손이 순간 멈췄다가 곧 다시 타이핑을 이어 갔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너한테는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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