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승합차 안 히터조차 소유나의 서늘한 마음을 데워 주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조금 겁이 났다.
‘어차피 그 사람 목숨은 카운트다운 중인데, 무슨 수를 쓰겠어?’
소유나는 심호흡을 하고 유연서에게 진정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차는 구룡시에서 가장 큰 클럽 앞에 멈춰 섰다.
기사는 문을 공손히 열었지만 표정에 존중이라고는 없었다.
소유나가 내리자 남자가 앞장서 걸었다.
현란한 복도를 지나 맨 끝 방 앞에 서자 양쪽 문이 활짝 열렸다.
남자는 비켜서며 말했다.
“데려왔습니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이미 시위에 걸린 화살처럼 물러설 수 없던 소유나는 온 김에 가보자는 심정으로 태연히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밀폐된 공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기는 희박해진 듯했고, 심장은 유난히 크게 뛰었다.
시선을 돌리자 안쪽 가죽 소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몸을 깊숙이 묻은 그는 멀리 있어서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어둑한 방 안, 담뱃불이 붉게 깜빡였고 연기는 희미하게 퍼졌다.
소유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가가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진발이 안 받는 얼굴이었다.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훨씬 잘생겼다. 다만 사진보다 훨씬 창백했다.
검은 셔츠 깃이 살짝 열려 드러난 목과 쇄골은 유난히 섹시했다. 병약한 듯한 흰 피부가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더욱 섬세하고 차갑게 보이게 했다.
그런데 정신은 또렷해 보였다. 전혀 시한부 같지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얼굴이라면 많은 여자가 아이를 낳아 주고 싶어 할 만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자, 그가 혼인증명서를 손에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때 안서영이 챙겨 갔던 바로 그 증서였다. 아들에게 혼인신고가 됐다는 걸 당연히 알렸을 터였다.
‘그런데도 피하려고 했다니, 내가 순진했네.’
“사람이 돈 때문에 죽는다는 말 못 들어봤어?”
문지후가 눈앞의 소유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 시점에 자신에게 시집온 여자라면 결국 돈이 목적일 터였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아는 소유나는, 그 말이 돈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임을 깨달았다.
차라리 부딪치기로 하고,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로 입술을 올렸다.
“내가 지후 씨를 짝사랑해서 오래전부터 결혼을 준비해 왔다면 어때요?”
문지후는 손가락 사이 담배를 힘껏 쥐었다.
‘오래전부터?’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거짓말과 가식적인 웃음을 문지후는 단번에 꿰뚫었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꾹 비벼 끄고, 긴 손가락을 모아 그녀를 향해 까딱했다.
소유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금 더 다가섰다.
문지후가 다리를 내리고 상체를 세우더니, 손목을 낚아채 그녀를 그대로 품에 끌어당겼다.
예상 못 한 힘에 그녀는 그에게 안기듯 부딪쳤고, 곧바로 밀려나듯 그의 무릎 위에 앉혀졌다.
허리춤이 바짝 죄여 왔다. 두터운 코트를 사이에 뒀는데도 그의 손이 닿은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결혼증명서 모서리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유나 씨, 나를 좋아해?”
깊은 눈동자에는 조롱이 서려 있었다.
턱끝을 긁는 종이 가장자리가 불편했지만, 소유나는 담담히 눈을 맞췄다.
“구룡시 미혼 여자들은 다들 지후 씨를 좋아할걸요?”
“하.”
문지후가 낮게 웃었다.
“죽는 거 안 무서워?”
“무서워요.”
그가 눈썹을 올렸다.
“그런데 어차피 언젠가는 죽잖아요. 죽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하고 부부가 되면 미련 없을 것 같아요.”
‘허튼소리도 참 능숙하네.’
문지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를 밀쳐냈다.
그는 자신이 앉았던 허벅지를 툭툭 털어내며 노골적으로 싫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혼해.”
소유나는 균형을 잡으며 옆에 내팽개쳐진 결혼증명서를 흘끗 봤다.
“이혼하려면 한 달 숙려 기간이 필요해요.”
문지후가 눈길을 들었다.
소유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일어서자 몸매는 더 확연히 드러났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 곧게 뻗은 다리... 바짓단이 스치며 그녀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박히자, 소유나는 방금까지 품었던 감탄을 거둬들였다.
“나는 이혼 안 해요.”
문지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소유나는 맞받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깊이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지후 씨 아내가 되어야 당당히 돌보고, 아이도 낳을 수 있으니까요. 남은 시간이 얼마든 후회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기적이라 해도, 지후 씨와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예요.”
소유나는 눈가까지 촉촉해지도록 열연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감정이 술술 나왔다.
문지후가 바짝 다가와 낮게 물었다.
“뭐든 할 수 있어?”
압박감에 숨이 막혔지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어요.”
그가 옅게 웃자, 소유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문지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릎 꿇어.”
소유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냉혹한 눈빛이, 얼음처럼 찬 기운이, 그녀가 제대로 들었다는 걸 증명했다.
“그것도 못 해?”
‘이게 바로 연서가 말한 변태구나.’
문지후의 눈에 서린 경멸을 본 소유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코트를 벗어 소파 위로 던지고, 흩어진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은 뒤 곧장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이렇게 해도 돼요?”
이렇게 하니 그녀의 시선이 문지후보다 조금 높아졌다. 고개를 살짝 숙여 내려다보자 그의 눈에 잠깐 스친 놀라움이 보였다.
몸에 딱 붙는 검은 니트는 그녀의 굴곡을 하나도 숨기지 않았고, 청바지는 둥근 엉덩이를 꽉 감싸고 있었다. 곧게 편 허리는 보기만 해도 유연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 숨결이 그대로 얽혔다. 자세는 충분히 뜨거웠고, 금세라도 화끈한 장면이 펼쳐질 듯했다.
소유나의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화사했다. 여우 같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를 띠자, 문지후의 깊은 눈동자엔 그녀의 유혹적인 웃음만 가득했다.
“벗겨.”
살짝 창백한 그의 입술이 가볍게 열리며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유나는 숨을 고르고 그의 가슴께로 손을 옮겼다. 백옥 같은 손가락이 검은 단추 위에 얹히자 흑백 바둑이 부딪히는 듯한 대비가 생겼다.
첫 번째, 두 번째... 단추가 풀릴 때마다 차가운 백색 피부가 조금씩 더 드러났고, 그녀의 숨도 점점 가빠졌다.
고개를 들자 문지후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높은 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장난감을 바라보듯 말이다.
소유나는 이를 악물고 단추를 더 풀었다. 손이 실수로 그의 복근을 스치자, 문지후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의 심장이 철렁했다.
“이렇게 느려서야 아이는 언제 만들 수 있겠어?”
흔들리던 숨을 다잡으며 소유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 하면 안 된다잖아요. 설렐 때 생긴 아이가 더 예쁘고 똑똑하다던데요.”
문지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웃었다.
“그래?”
“네.”
용기를 내어 다른 손으로 셔츠 안쪽을 더듬으려 하자, 그는 그 손마저 붙잡았다.
“내 것만 벗기면 불공평하지.”